진나라 영토를 평양 위쪽까지, 명나라 만리장성을 압록강까지 만든 중국

페이지 정보

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194회 작성일 23-12-25 01:35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luroKFeyASQ

본문


[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진나라 영토를 평양 위쪽까지, 명나라 만리장성을 압록강까지 만든 중국

압록강 하구의 해양방어체제

* 해양전략적 가치와 역사적 상황

  단동(丹東)은 신의주 건너편의 도시인에 고대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1947년에 도시를 세우고 안동(安 東)으로 불리워졌는데 1965년에 단동으로 바꾸었다. 

신석기 유적인 단동시 후와(後洼) 유지(6000년 이상 된 곳)에서 배모양의 토기가 3개 발견되었다. 고구려에게 서한만 지역은 국내성의 출해구이며, 만주와 한반도가 만나며 황해북부 연근해항로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전략적 요충지는 서안평이었다. 

건국한 초기부터 활용했으며, 233년 이후에 오나라의 손권과 교섭할 때 사용하였다. 중국에서 5호 16국시대에 고구려는 330년 이후 산동반도의 후조와 군사동맹을 맺을 때 활용하던 군항이었다. 때문에 강의 하구와 섬들을 중심으로 해양방어체제가 구축되었고, 단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강변방어체제를 구축했다. 그 성들 가운데 하나가 박작성이다.


박작성(泊灼城)

단동시내에서 떨어진 관전현 호산촌(虎山村)에 있다. 높은 규모의 산은 아니고 146여m 정도의 크기이다. 현재는 명(明나라의 장성인 탑호산성(塔虎山城)이 있다.

648년에 당군이 침입할 때 수군 3만을 거느리고 압록수에 들어와 100여 리를 지나 박작성에 이르러(구당서 등) 남쪽 40리 지점에다 군영을 설치하였다(삼국사기).  고구려의 성주 소부손(所夫孫)은 기병을 거느리고 저항을 하다가 무너졌다. 이때 기록은 ‘박작성은 산을 의지하여 요새를 구축하였고, 鴨淥水가 가로막아 견고하였다.’라고 했다. 

위치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으나 현재 관전현 호산향(虎山鄕) 호산촌(虎山村)에 있는 명(明)나라 장성의 유지이다. 발굴하여 석벽 500m를 발견하였고, 큰 건물터도 발견됐다. 또 돌로 쌓은 우물은 직경이 4,4m, 깊이가 13m이다. 내부에서 길이 3,7m의 목선과 몇 개의 나무노가 출토되었다. 고구려 시대의 유일한 목선이다. 성 안에서는 철촉․철창·철도끼 등 무기와 거울․낫․괭이 같은 농기구들이 발견됬다. 고구려는 이들 산성 외에도 압록강 하류에 많은 성들을 쌓았다.(손영종) 

1995년에는 영상에서 보이듯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중국은 2004년도 이후에 동북공정을 하면서 명나라의 만리장성 동쪽 끝이라며 대대적으로 성과 건물들을 만들고, 전시관을 만들어 역사를 왜곡하는 중이다. 여러차례에 걸쳐 규모를 확장하면서 대대적인 관광지로 만들었다. 


참고자료 

 신형식 최근영 윤명철 오순제 서일범 지음 : 고구려 산성과 해양방어체제 , 백산, 2000

  윤명철 : 고구려 해양사 연구, 사계절, 2003 / 해양방어성(해성) 연구 , 수동예림, 2022 등

논문 : 윤명철

 - 요동지방의 해양방어체제연구, 정신문화연구, 겨울호, 통권 77호, 1999

 - 고구려의 요동 장산군도의 해양전략적 가치 연구, 고구려연구  15, 학연문화사, 2003

 - 국내성의 압록강 방어체제연구, 고구려  연구 15, 고구려연구회,2003

 - 고구려 수도의 해륙적 성격, 백산학보 80, 2008 등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공지글


최근글


새댓글




참한역사칼럼 바로가기
참한역사신문 바로가기
참한역사 동영상 바로가기
新바람 한민족역사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