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두만강은 1천 년 동안 만주진출을 막은 관념의 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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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336회 작성일 23-06-08 19:56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j9RbF6NfI-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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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교과서는 왜 고구려 첫 수도를 '홀본'이 아닌 나쁜 의미인 '졸본'을 고집할까? /후반부 환인사진들 


주몽이 동부여에서 烏伊 摩離 狹父  등 추종집단을 거느리고 남천하여 고구려를 세운 곳은 어디일까? 고주몽은 남으로 이동하여 동가강 혹은 비류수가에 홀본부여(고구려)를 세웠다. 광개토태왕릉비문에는 비류곡 홀본 서쪽성의 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라 했고, 삼국사기에는 동명왕 4년(기원전 34) 7월에 성곽을 쌓고 궁성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서에는 이곳을 紇升骨城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광개토태왕릉비문에는 그의 죽음을 “하늘이 황룡을 아래로 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께서는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머리를 딛고 하늘로 오르시었다.”(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고 표현했다.  

그만큼 ‘홀본’이라는 단어는 원래 특별하고 단단한 의미가 담겨있었는데, 삼국사기가 졸본이라고 변형시키는 바람에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어졌다. 광개토태왕릉비문에서 보이듯 원래의 명칭은 홀본이다. 즉 ‘忽의 根本’이라는 의미이다. 忽은 고구려말인데, 골 들 산 나라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천은 미추홀, 수원은 매홀, 포천은 소홀 등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홀본부여는 근본이 되는 부여, 즉 부여 정통성을 갖고 있는 나라라는 의미이다. 김부식은 왜 그런지 모르지만 忽이라는 글자 대신에 좋지않은 어감을 지닌 ‘卒’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그것을 모두가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홀본’이 얼마나 중요한 낱말이고 장소인가는 삼국사기가 비록 졸본이라고 표기하였지만 그 후에도 임금들이 즉위한 후에는 곧 홀본을 방문한 데서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주장한 이후로 홀본을 오늘날의 환인이라고 보고, 시내를 굽어보고 있는 거대한 바위덩어리인 오녀산 위에 쌓은 산성을 흘승골성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길림 또는 통화지역을 추정한다.


윤명철 지음 : 고구려는 우리의 미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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