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여회 침략받은 사실은 틀리며, 육지로 바다로 개척과 침략했다. -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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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125회 작성일 23-06-08 19:56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4rrnde1zz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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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900여회 침략받은 사실은 틀리며, 육지로 바다로 개척과 침략했다. - 1부 


한 개체에게 정체성이 중요하듯이 집단, 특히 우리처럼 오랫동안 역사공동체를 이룩해온 집단에게 정체성이란 생존과 직결된 요소이다. 정체성이란 관념적인 자의식이나 문화의 문제를 넘어 정치 경제 사상 문화 모든 부분에 작동하는 기본이며 근본인 원핵이다.  그런데도 우리 역사와 정체성에 대하여 근거없는 오해들이 아직껏 난무한다. 일본인들은 ‘조선반도’라는 용어를 만들어 ‘반도적 숙명론’, ‘반도적 근성론’ 등의 ‘반도사관’을 만들어 강요했다. 하지만 고려 이전에는 만주 일대와 한반도 그리고 340만 평방 km에 달하는 해양이 활동 공간이었다. 또 우리는 항상 침략을 받았고, 사대성과 타율성이 강할 뿐 아니라 정적이고, 恨으로 가득찬 문화라고 배웠다.  하지만 사실은 역사의 출발부터 유라시아의 전 지역과 대륙과 해양으로 교류하였으며, 동아시아에서는 동서남북으로 부단하게 진출하였으며, 특히 일본열도는 선단들이 상륙하여 개척하고 나라들을 세웠다. 또 기가 막힌 오해는 자원이 부족했고, 농경만 해서 가난한나라였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황금 철 모피 등 자원이 풍부했고. 산업이 발달했으며, 해양활동과 국제무역이 매우 활발했었다. 특히 발해는 해양활동이 뛰어났고, 엄청난 규모의 무역국가였다. 그 밖에도 근거없는 오해들이 우리 정체성을 왜곡시키고, 지식인들을 타율적이고, 외세의존적 존재로 오염시켰다. 


이 터에 정착한 우리 조상들은 과감하게 자기 고향을 떠나 대장정을 시작했고, 오는 도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질병과 고통, 전쟁과 학살, 좌절감은 도중 포기를 재촉했을 것이며 내부의 갈등 또한 심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끝까지 온 사람들은 용감하고 탐험정신이 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땅에 정착한 이후에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매우 역동적으로 살아갔다. 부여와 고구려인들은 끝없이 너른 만주벌판을 말을 타고 달렸다. 기마민족의 피와 문화가 섞인 탐험가의 후손들은 만주일대를 개척하면서 더욱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백제는 해양문화가 발달해 황해와 남해에서 활동했고, 가야는 일찍부터 일본열도로 진출했다. 신라는 뒤늦게 출발했지만 역동성과 패기로 삼국을 통일하였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북으로 연해주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험난한 겨울의 동해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와 활발한 교류를 펼쳤다. 뿐만 아니라 홋카이도 일대를 넘어 사할린지역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그 시대의 사람들은 곳곳에서 문화를 꽃피우며 나라를 만들어 발전시켰다.

 

윤명철 지음 : 한국해양사, 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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