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은 극소수의 원주민들(조오몽인)과 야요이시대 및 고분시대에 집중적으로 건너간 다수의 한국계주민들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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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616회 작성일 23-06-09 00:53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4JMl9HRBb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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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일본인은 극소수의 원주민들(조오몽인)과 야요이시대 및 고분시대에 집중적으로 건너간 다수의 한국계주민들로 구성됐다.


원주민은 원래부터 살았던 사람들, 즉 최초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논리라면 일본열도에는 구석기 시대에도 인류가 살았다.  ‘원일본인(原日本人)’은  ‘아까이시인(明石人)’으로 불리는 인간의 뼈가 혼슈우의 중부지방인 효고현(兵庫縣)에서 발견되었으며, 더 후기의 구스우인(葛生人), 우시가와인(牛川人) 등도 있었다.  다음 두 번 째로 인종이 유입된 파장은 충적세의 시작과 함께 나타났다. 수면이 상승하면서 한륙도와 일본열도 사이에는 바다가 생기고,   죠오몽(繩文)문화를 담당하고 발전시킨  신석기 시대가 열렸다.  

일본열도로 인종이 유입된 과정을 다시 세분하면 보다 복잡하다. 

먼저 북방 대륙계의 경우는 4개의 루트를 상정할 수 있다. 

북방의 수렵삼림문화가 한반도를 경유해서 들어오는 길, 북서방향에서 진행해온 유목문화가 역시 한반도를 경유해서 일본열도로 진입해 오는 길, 그리고 중국의 중원(中原)문화가 한반도를 거쳐 오는 길이 있다. 이 3 길은 일본에서 문화와 인종이 만들어지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 시베리아 지역에서 오호츠크해를 이용하면서 사할린 등을 거쳐 홋카이도, 혼슈우로 들어오는 북방계의 인종과 문화가 있다. 이들은 이동로와 출발지의 자연환경을 볼 때 산발적이고 소규모였으므로 큰 영향을 주지 못했고, 일본문화의 주류에서는 벗어났다.

남방계는 3개의 루트를 상정할 수 있다. 일본의 학자들은 언어 민속 혹은 신화 등의 분석을 통해서 일본문화의 기원을 남방계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특히 2차대전 전에는 한반도와 관련된 부분을 약화시키고, 그들이 주장한 ‘대동아공영권’의 이론적인 토대를 구축할 목적으로 ‘남방문화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첫째는 남중국의 방면에서 황해 혹은 동중국해를 건너서 서부일본으로 들어오는 문화가 있다. 절강성을 비롯한 양자강 이남의 지역에서 일본열도로 들어오는 문화의 흔적은 적지 않다. 이 문화는 역사 시대 이후에 꾸준히 들어와서 일본문화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문화의 교류, 주민의 이동은 작은 규모나 불연속적인 교류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는 동남아시아에서 대만 등을 거쳐 오끼나와 제도를 징검다리로 삼아 상륙한 인종과 문화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문물과 필리핀 동남아시아 대만 등의 문화는 쿠로시오(黑潮)의 흐름과 봄에서 여름에 걸쳐 부는 남풍 계열의 바람을 이용하여 오끼나와(沖繩)제도로 상륙하고, 다시 큐슈의 남단으로 상륙한다. 이들 지역의 상호접촉은 수용만이 아니라 전파라는 모습까지 나타났다. 오끼나와 등에서 필리핀의 북부에서 사용된 조개도끼 등의 도구와 민속이 발견된다. 하지만 오끼나와는 19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일본의 문화권으로 편입됐으므로 고대의 일본 역사나 문화는 관련없다. 

셋째는 남태평양에서 해류를 타고 일본열도의 중부로 상륙하는 문화이다. 사이판 등 미크로네시아의 섬들에서 일본 열도의 중부인 동경만까지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거쳐서 연결되므로 인종과 문화의 유입이 가능하다. 때문에 일본문화를 항해문화와 선박 등의 남태평양 문화와 관련시켜 주장한다. 

 이처럼 자연의 흐름 위에 편승한 종족과 문화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으며, 당시의 항해능력으로 볼 때 주류는 대한해협을 직접 건너 한륙도에서 진입하는 북방 대륙계 종족이다.

 죠오몽 시대인은 중기 구석기 시대인의 일부와 한륙도 및 대륙에서 건너간 대부분의 종족으로 구성됐다. 현재 홋카이도에 남은 ‘아이누족’은 원일본인 이후에 들어온 가장 오래된 종족이다. 그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구축되어 현재는 정부의 보호정책에도 불구하고 약 27000 명 정도가 고유문화를 형식적으로 유지한 채 종족만을 간신히 보존하고 있다. 

 죠오몽 시대가 끝나고 B C 3세기 무렵에 야요이(彌生) 시대가 시작되면서 주민구성에 변화가 생겼다.  벼농사(稻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그것을 발달시킨 집단들이 대량으로 이주한 현상 때문이다. 인구가 폭발한 것이다.  이 시대의 인종들은 어떻게 구성됐는가를 확인하는 실험이 있었다. 우선 인구증가율에 의한 모의실험을 하고, 또 두개골의 형태가 장기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조사하는 형태변화 모델을 이용했다. BC 300년 경 부터 AD 700 년까지의 약 1000년 동안 원주민과 이주민의 구성 비율을 조사했더니 앞의 실험을 통해서는 죠오몽 직계 자손인 원주민의 비율과 도래인(이주자)의 비율이 1:9,6이라는 숫치를 얻었다. 또한 두개골의 변화를 통한 실험에서는 서부일본, 쥬코쿠(中國), 긴키(近畿) 등의 세 고분인구 집단은 이주계이며, 혼혈율이 1:9 내지 2:8에 가깝다는 결과를 얻었다. 한편 원주계라고 여겨지는 간토오(關東) 지방의 인구집단의 경우에도 혼혈율의 비율이 원주민: 이주민= 3:7로 이라는 숫치를 얻었다.  동경대의 하니와라 기스오(埴原和郞)교수의 조사이다. 「Estimation of Early Migrants to Japan, A Simulative Study」 "人類學" 95(3),1987에 실려 있다. "百濟의 大和倭와 日本化 過程"  崔在錫 지음. 일지사. 1990. pp31~39에서 재인용

 큐슈와 야마구치현에서 발굴된 야요이 시대의 인골들을 분석했더니 얼굴이 높고 키가 큰 고안고신장형(高顔高身長形)이었다. 신장이 162,9cm정도였다. 

야요이 시대가 끝나면서 300여 년 간에 걸친 고분시대가 시작된다. 진출한 주민들은 동일한 시기에, 어느 한 곳에서 온 것이 아니다. 또한 정치적인 성격들이 달라서 출발항구와 항로가 달랐다. 초기에는 큐슈 북부를 중심으로 가야계 사람들이 진입했고, 그 후에는 백제계가 서북큐슈 지방을 발판으로 진출했고, 이후 키나이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훗날 일본의 고대 황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한편 신라계 또한 동해남부의 바다를 건너 독자적으로 큐슈 북부 해안 및 혼슈 남부 등에 진출하였다. 고구려는  북한 학자들은 3세기 경 부터 간헐적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5세기 초부터는 조직적으로 진출했다고 판단한다. 

결국 전반적으로 보면 일본민족의 기원은 한륙도의 주민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다만 야요이인 이전의 죠오몽인에 대해서는 좀 더 확실한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쿠로시오(黑潮)나 동남 계절풍을 타고 꾸준히 소규모로 흘러들어온 남방계 인종 역시 일본민족 및 문화형성에 부분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여야 한다.


윤명철,  "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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