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은 발해만 항구도시. 무역과 전략적 가치가 뛰어났다. 영화 '안시성' 의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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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555회 작성일 23-06-08 23:05본문
[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안시성은 발해만 항구도시. 무역과 전략적 가치가 뛰어났다. 영화 '안시성' 의 비평
안시성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645년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 장군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고구려는 무너졌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백제 신라의 존재도 무의미해질 수 있다. 당에게 두 나라는 고구려의 배후를 압박할 수있는 가치였을 뿐이었다.(윤명철, "고구려 해양사 연구")
안시성의 위치를 놓고 많은 논쟁들이 있다. 안시성 성주의 이름하나 보존 못한 우리의 한심한 태도가 성의 위치마저 망각한 것이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실제로 영성자 성에 가면 조그만 규모의 놀라고, 안시성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일으키게 한다. 극소수가 주변의 성을 지목하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영성자 산성 외에는 대안이 없다. 혹시 우리가 중국과 함께 발굴에 참여한다면 더 검증해볼 수 있지만 그것 또한 현실성이 없다.
다만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환경과 그 시댕대의 자연환경은 다르고, 해안선의 위치도 다르다. 그 시대에는 해안선이 내륙으로 들어와서 현재 영성자 산성이 있는 해성은 바닷가 지역이었다. 만약 영성자 산성이 안시성이라면 안시성의 전략적 가치와 전황, 역사적인 상황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래 자료를 올린다.
필자의 저서인 "고조선 문명권과 해양활동 "에서 왕험성 위치부분의 내용에서 가져온 것이다. 참고삼아 말하면 필자는 왕험성의 위치를 고구려때의 요동성으로 본다. 필자의 저서 참고바람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 조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遼東郡은 秦나라가 설치했다. 幽州에 속한다. 襄平 新昌 無慮 西部都尉 치하에 있다. 望平, 大遼水가 塞外로 나와 남쪽으로 安市에 이르러 海로 들어가며, 1천 2백 5십리를 간다.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의 「浿水考(上)」에서 중국 사료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험독현 주석에 험독을 “조선왕 滿의 도읍, 즉 왕검성이라 하였으므로, 왕검성(평양)인 험독은 지금의 해성인 것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또한 북한의 학계도 海城 부근 또는 蓋州를 왕험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지도에 따르면 그 시대에는 해안선이 해성까지 올라간다. 『한서』 지리지에서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一千二百五十里”라고 하였고, 또한 『水經註』에서 “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望平縣西 屈而西南流 逕襄平縣故城丙”; “東逕遼隊縣故城西 南小遼水 右會白狼水 至安市縣入海”라고 하였다. 『通典』에서 “大遼水源出秣鞮國西南山 南流至安市入海”라고 기재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三岔河 지역은 3개의 물길이 만나고 있다. 만약 安市가 海城이라면 안시의 위치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우선, 『盛京通誌』와 『奉天通誌』에서 “海城東南十三裏之英城山 即漢唐之安市”라고 하여 그의 위치를 海城縣南의 英城子로의 주장하였으나, 설2는 『遼史・地理誌』와 明나라의 『遼東誌』의 “安市廢縣 在蓋州城東北七十裏 漢置…今為湯池堡”란 기록을 근거하여 遼寧 營口縣 北의 湯池堡로 주장한다.
그 시대 교통로의 종점에 해당하는 곳도 현재의 海城이다. 그 시대에는 바닷가에 있었던 항구도시였다. 그러므로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필자는 다른 견해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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