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천재' 세종대왕의 정책과 사상-2 | 국토 팽창과 대마도 정벌, 인본 정책과 한글 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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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598회 작성일 23-05-31 23:58본문
[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역사의 천재' 세종대왕의 정책과 사상-2 | 국토 팽창과 대마도 정벌, 인본 정책과 한글 창제
넷째, 국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국제질서를 최대한 활용했고, 자주국방에 심혈을 기울였다. 1432년(즉위 14년) 12월에 여진족이 기마병으로 압록강을 넘어 약탈하자 분노한 세종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작전회의에 참여하면서 직접 전술까지 지시했다. 결국 두만강 유역에 6진, 압록강 유역에 4군을 설치해 발해 멸망 후 불안정했던 이 지역을 안정적인 영토로 삼았다. 남쪽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땅을 개간하는 사민(徙民)정책까지 추진했으나 실패로 끝나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비록 상왕인 태종의 정책이었지만, 즉위 해인 1419년에는 이종무를 파병해서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어 1426년에는 삼포(부산, 창원, 울산)를 개항했고, 1443년에는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정책으로 선회하는 등 강온양면 정책을 구사했다. 세종은 전쟁을 치르면서 군사장비를 만들고, 무기들을 개량했다. 1448년에 신기전이 발명됐는데, 한 번에 15발씩 연속으로 100발을 발사하고, 사거리가 1,000m 이상인 신병기였다. 수레 등으로 운반이 가능한 조립식 대포(총통 완구)를 만들었고, 화포 주조와 화약 사용 방법, 규격 등을 그린 『총통등록』도 발간했다. 해전을 위해 일본인과 유구인의 도움을 받아 개선한 선박들을 한강에서 시험운행을 했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고 했던 태종의 평가처럼, 뛰어난 전제군주라고 볼 수 있지만, 세종은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다섯째, 세종은 백성들의 생활력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착취경제가 아닌 생산경제의 도입을 시도했다. 정치의 근본은 백성들의 유복한 생활임을 깨닫고, 이를 실천한 인본주의자였다. 농법개량에 노력을 기울여 1429년에는 농사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농사직설』을 편찬했다.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비록 통치기술로도 활용했지만, 농사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이 강했다. 1433년에는 천체를 관측하는 ‘혼천의’와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다음해에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1442년부터는 측우기를 사용해 전국의 강수량을 골고루 측정해 농사에 도움을 줬다. 그는 조세를 감면하는 정책도 다양하게 구사했다.
전국의 토지를 풍흉(豊凶)에 따라 9등급(연분 9등법)으로, 비옥도를 검사해 6등급(전분육등법)으로 나눴고, 20년마다 재측량했다. 이렇게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하는 일은 당연히 대지주들인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7년 동안 논쟁을 벌인 끝에 즉위 25년째인 1443년에 실시했다. 그 밖에도 도량형을 정비하고, 조선통보라는 금속화폐도 주조했다. 만약 많이 사용됐다면 실물경제와 화폐경제가 활성화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국력도 신장됐을 것이다.세종은 후생복지 정책에 힘을 기울여 굶는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의창을 설치했고, 백성들의 건강과 치료를 위해 ‘혜민서’, ‘활인서’를 설치했으며,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의 의학서적도 출판했다. 또한 1430년에는 서열이 엄격한 신분제사회에서 고가의 사유재산인 공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고, 매질하는 사형을 금하는 법까지 제정했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제군주와 양반들이 지배하는 서열사회의 근간을 흔든 성군이었다. 하지만 그를 역사의 천재로 평가한 것은 또 다른 의미깊은 업적 때문이다.
여섯째, 세종은 지성인들의 말과 성인들의 실천을 국가정책으로 집행하려 노력한 정치가였다. 그는 백성을 시혜나 훈도의 대상을 넘어 기본적으로 평등하고, 삶의 주체가 돼서 존재가치를 구현해야 하는 인간으로 보았다. 때문에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기호를 공평하게 가져야 한다고 판단한 듯하다. 오랫동안 집현전 학자들과 협력해 연구한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성공했다.
3년간의 검증 기간을 거쳐 1446년에 반포한 훈민정음의 해례에 ‘제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제작한다고 선언했다. 모든 백성이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기호(code)’를 공평하게 가져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한글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탄생한 글자다. 동시에 인류의 지적 성장, 향상된 사고능력, 과학의 발전, 진보된 사상(인간주의)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특히 개인이 목적의식을 갖고 단기간에 창작한 글자란 점에 주목을 받는다. ‘표음문자’여서 학습이 쉽고 사용에 편리하다. 논리적인 음운체계 덕운에 사용자가 수리적인 사고에 익숙해질 수 있다. 그 때문에 많은 학자가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했고, 구조와 제정 방식에 관심이 많다.
단군 의식이 강하고 다독가였던 세종이 가졌던 인본사상의 근저에는 ‘홍익인간’이 집약된 우리사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한글은 체계의 독창성과 탁월함 때문에 ‘옛글자설’, ‘파스타 문자설’, 심지어는 ‘창살설’ 등 모방성들이 제기됐었다. 하지만 한글은 상징문자나 표의문자가 아니라 표음문자이다. 말을 만드는 이빨(齒)·혀(舌)·목구멍(咽喉) 등 발성기관의 형태를 차용하고, 28개의 기호를 초성음·중성음·종성음으로 구분한 후 각각 순서와 비율을 계산해 조합했다.
따라서 조합 능력이 향상된 현대문명에 가장 적합하고 우수한 컴퓨터 언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조합에는 반드시 구성 ‘논리(logic)’와 ‘의미(meaning)’가 있다. 자음은 오음, 오성의 음상에서 확인되듯 오행사상과 연관이 깊다. 또한 필요성의 반영인지, 논리적인 필연인지 중성글자인 모음은 기본자 ‘· ㅡ ㅣ’를 기본으로 변형된다. 이는 천원(天圓)·지방(地方)·인위(人位)의 3재를 의미하고, 1·2·3 이라는 수리를 반영한다. 상용화된 문자는 사람의 가치관, 사회의 체제, 문화의 성격에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면 명민한 세종은 ‘훈민정음’을 통해서 신조선에 인간주의, 합일과 상생의 가치관을 이식시키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훈민정음 덕분에 소수의 백성과 여인들은 제한적이지만 삶의 주체임을 자각했고, 자기 권리를 요구할 때도 큰 도움을 받았다. 500년이 지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훈민정음의 가치는 폭발적으로 빛을 발했다. 한글이 일상화된 덕분으로 감성적이고, 추상적이며, 사변적인 한국문화는 논리적 사고, 수리적 사고, 합리적인 행동에 기초한 사회구조로 변했다. 교조성이 적어지고 실용성이 강해졌다. 한글은 표기방식의 효율성, 신속한 판단과 응용능력 향상에 적합한 기호로 현대 한국을 디지털 문명의 선도국으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조선이 건국된 초기는 역동성, 자발적인 창조성을 발현하는 인재들의 시대였다. 세종은 인재들을 발굴하고 키웠으며, 역사의 인물로 만든 인재 중의 인재인 ‘역사의 천재’였다.
참고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한국경제신문연재), " 다시보는 우리민족", " 동아시아의 영토분쟁과 역사갈등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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