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지 관련 토론. 전주 실크로드 석굴 문화와 소구드 예술 국제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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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33회 작성일 24-06-07 01:10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B4I6mXQlF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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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월지 관련 토론. 전주 실크로드 석굴 문화와 소구드 예술 국제회의


안녕하십니까?

저는 루스탐 교수가 발표한 월지(月氏)의 역사에 대하여"

("FROM THE HISTORY OF THE YUEZHI")

(月氏人历史)의 토론을 담당한 윤명철입니다.


동국대학교를 정년퇴임하고 현재는 우즈베키스탄 국립사마르칸드 대학교 교고학과에 재직중입니다. 

주 전공은 한국 고대사와 동아시아 해양사이지만, 유라시아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연구하고 답사중입니다. 월지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주전공이 아니지만 실크로드의 개척과 인적인 교류, 그리고 동아시아 문화에 끼친 영향과 동아시아의 정체 역학관계가 결정되는데도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를 비롯해서 ‘월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합니다. 다행하게도  전주에서 개최되는  ‘석굴문화’와 ‘소그드 예술’ 국제회의의에서 루스탐 교수가 월지에 대하여 발표를 했습니다. 

아주 잘 들었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월지(Yuezi)’라는 존재는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공식적으로는 bc 3세기 경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현재 중앙아시아 지역, 타클라마칸 사막 및 감숙성 일대에 연관이 깊은 주민들이 거주한 것은 고고학적인 발굴성과와 중국 사료에 나오는 몇 몇 종족들을 고려하면 분명합니다. 그들은 다만 ‘흉노’라는 이름의 존재와 더불어 행적이 처음 기록된 것입니다. 월지인들은 흉노에게 대패한 후에 서쪽으로 이동해서 중국에서는 대월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이어 박트리아 왕국을 격파한 후에 쿠샨(Kyushan, 貴霜) 왕조를 세웠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 역사상의 위만조선이라는 존재의 등장과 멸망도 연관이 됐습니다. 그 밖에도 이들이 동아시아 및 서아시아 역사와 문화 예술에 끼친 영향은 막대합니다. 하지만 그 정체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은 일본, 러시아, 유럽, 중국 등의 학자들이 연구했습니다. 이제 중앙아시아 지역의 학자들이 월지의 기원과 활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연구성과들이 축적되어가는 중입니다. 이번에 루스탐 선생은 월지에 대한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기반으로 자신의 견해를 첨가한 논문을 발표했다. 


1. 월지는 누구인가?

1) G. Haloune과 K. Enoki는 월지가 스키타이인의 일부이며, 그들은 스스로를 Zguja라고 불렀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질문을 합니다.

 그렇다면 아리안과 스키타이의 관계를 설명해야 합니다.

 스키타이의 문화와 기록에 나타난 월지의 문화, 활동 공간 등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마사케타이가 역사에 등장하고, 알렉산더가 중앙아시아를 공격하기 이전에 현재 타클라마칸 사막과 동쪽에는 월지와 인종적으로 연관성이 깊은 주민들이 살았습니다.

'소하라 공주(Princess Of Xiaohe)' 미이라 등 고고학적인 증거들과 또한 월지 이전에 중국의 서북 지역에 거주했던 종족들의 이름이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선주민들로서 아리안계 등의 주민들이 거주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망을 개척한 후에 발전시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위쪽인 알타이(Altay) 지역에서도 서쪽과 동쪽의 무역망이 발달한 증거들이 발견됩니다.    

따라서 월지인들이 활동한 지역은 '원월지(proto Yuezi)' 또는 아리안(Aryan)계가 거주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2. 마사케타이인(Massaget)이 월지의 주체인가?

 (우즈베크 역사학자인 샤 카리모프와 R. 샴수트디노프의 "조국" 역사라는 작품에 따르면, 스피타멘의 반란이 패배한 후에 기원전 4세기 말(기원 전 328년)에 중국 사료에서 월지인이라고 불리는 마사게타이 부족들이 동투르키스탄에서 몽골 국경에 이르는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발표자는 알렉산더 대왕의 공격으로 패한 마사게타이 세력(3,000명)들이 훈족과 가까운 지역으로 이주하여 거주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질문을 합니다.

1) 당시의 국제질서나 전쟁상황을 고려하면 약간은 무리한 해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2) 월지인들이 등장한 시대와는 약 100년의 차이가 생깁니다.

3) 그 시대 흉노가 거주했던 중심부는 현재 몽골 초원의 동쪽이고, 또 통일이 되지않은 약한 세력이었습니다.


3. 소월지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통설이지만, 일본학자인 오다니 나카오가 정의했다. 

월지의 핵심세력들은 우즈베키스탄 남부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으로 이동해서 ‘대월지’로 붕불렸고, 남은 세력들은 현재 중국 감숙성 서부에 남아 ‘소월지’라고 기록됐습니다. 


4. 지도의 위치는  시대상황에 따라 변동하므로 논문으로 발표할 때는 내용에 따라서  지도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제언:  중국의 사료들을 정확하게  인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 시대에 동아시아 세계의 정치적인 상황, 자연환경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월지에 대한 발표를 해주신 루스탐  교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중앙아시아 학자들과 동아시아 학자들이 교류하면서 월지의 실체를 밝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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