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백제의 모국, 부여국 시리즈 1 | 부여의 영토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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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632회 작성일 23-05-31 23:26본문
[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고구려와 백제의 모국, 부여국 시리즈 1 | 부여의 영토와 역사
우리 역사에서 5국 시대를 이룬 부여국
우리 고대사는 ‘3국 시대’에 가야를 포함하면 ‘4국 시대’이고, 5세기 말까지 존속한 부여까지 더하면 ‘5국 시대’가 된다. ‘부여(夫餘,扶餘)는 원조선을 빼놓고는 가장 먼저 국가로 등장했고, ’북부여‘ ’동부여‘ ’홀본부여(고구려)‘ ’갈사부여‘ ’또 다른 동부여‘ ’남부여(백제)‘ ’부여말갈‘, 발해에 흡수된 ’두막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름으로 탄생하고, 부활하면서 무려 900년 가까이 존속했다. 이러한 부여의 실체를 이해하려면 만주지역의 지형, 기후, 생태계 등을 고려하고, 부족과 종족, 국민, 민족의 차이점, 산업, 독특한 행정시스템도 알아야 한다.
부여는 위만조선의 시대에 건국한 것은 분명하다. 국명은 『사기』의 식화열전에 처음 나온다. 탁리국의 시녀가 낳은 아이인 ‘동명’이 부여땅으로 이동해서 부여국을 세웠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지』 등에는 부여가 3세기 무렵에는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고,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는 선비와 접하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는데, 사방 2천리에 달하는 큰 나라였다고 기록했다. 나는 부여 지역을 여러 차례 답사했고, 대안에서 말을 타고 길림을 거쳐 압록강가의 집안(국내성)까지 내려오면서 지형과 이동 과정 등을 살핀 적이 있었다.
눈강과 송화강이 합류한 지점은 넓은 송눈평원이 있어 사료의 내용처럼 토지가 넓고 비옥해서 오곡을 생산하는데 적합하다. 또한 초원이 발달해서 소를 잘 사육하고, 기록처럼 명마를 기를수 있고, 송화강과 눈강 등 긴 강과 훌론호, 보이르호 큰 호수들을 이용하여 어업도 발달했다. 특히 동쪽은 읍루와 물길계가 거주하는 숲(taiga)지대로 이어져서 질 좋은 목재와 약재, 산삼 등 작물이 산출됐고, 호피, 표피, 웅피, 담비가죽 등을 취급하는 모피산업이 발달했다. 그리고 풍부한 금산지였다. (윤명철, 『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이들은 농사를 짓고, 흰색을 숭상해 흰옷을 즐겨 입었던 평화로운 사람들이었다. 사냥철이 시작되는 음력 12월에 영고(迎鼓)라는 축제를 벌였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등 유목민의 풍습을 유지했듯이, 먼저 북방 기마문화도 발달했다. 이러한 문화와 기술력 등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에 강한 영향을 끼쳤고, 우리가 일본열도로 진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부여의 멸망과 두막루국
부여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관리받다가 494년(문자왕 3)에는 나라를 들어 항복했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두막루국을 세워 부여의 풍습과 성품을 잘 보존했는데, 동쪽 끝이 바다와 닿았고, 사방 2천리였다고 한다. 송화강과 흑룡강 중류 일대로 추정된다. 그런데 『위서』 실위전과 『신당서』 유귀전의 기록을 종합하면 북부여의 후예인 두막루와 실위, 거란, 거란계인 고막해는 말이 같다. 그런데 부여와 고구려, 백제는 말이 통하고, 동예는 부여의 별종이므로 언어가 통한다고 했다. 옥저도 『후한서』에 따르면 언어·습속·거처·의복이 고구려와 흡사하다. 그렇다면 부여어는 몽골어계로서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일대에서 가장 많이 통용된 언어였고, ‘부여계’ ‘선비계’ ‘거란계’는 일종의 언어공동체였다.
이러한 부여의 실체를 이해하고, 우리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만주의 지형, 기후, 생태계 등을 고려하고, 부족과 종족, 국민, 민족의 차이점, 산업, 독특한 행정시스템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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