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선 계승성 시리즈 4 | 고구려의 유적 유물은 원조선의 공간, 주민, 산업,기술과 사상,예술 등의 문화를 계승한 증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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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576회 작성일 23-06-09 00:53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C_NDr3Phj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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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원조선 계승성 시리즈 4

고구려의 유적 유물은 원조선의 공간, 주민, 산업,기술과 사상,예술 등의 문화를 계승한 증거들이다. 


국가단위 간의 계승성을 주장할 때에 핵심요소 가운데 주민과 영토, 인식 외에 중요한 것은 문화적인 계승과 共質性이다. 고조선 지역의 고고학적인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서 고조선 문화가 고구려로 계승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묘제의 형식과 기능, 분포범위의 유사성은 집단의 계승성을 입증하는데 유효성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고조선의 기본적인 무덤양식은 지석묘이며, 고구려 전기의 기본적인 양식은 적석묘이다.  인돌은 원조선의 전 영역에서 발견된다. 요동지역에는 큰 규모의 고인돌이 약 100여기가 있다. 남만주 고구려의 중심영역에서도 고인돌은 많이 발견된다. 한반도의 서북지방, 황해도 일대에는 더욱 많아서 평양 일대에는 수 천 개의 고분이 있고, 시초형으로부터 중기형 말기형까지 다 보인다(석광준). 

적석묘는 시간의 격차를 두고 거의 유사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변형고인돌을 토대로 고구려의 적석총이 시작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980년에 이전복은 「집안고구려묘연구」에서 집안현에 12,358곳의 고구려묘가 있음을 밝히고, 구분하여 석분은 적석묘, 방단적석묘, 방단계제적석묘, 방단계제석실묘, 봉석동실묘로 구분했다. 적석묘는 집안현 외에도 만주의 전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는 지역인 요동반도 남쪽은 적석묘가 일찍부터 발견되었다. 강상무덤 루상무덤은 무기단 적석총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리지린 강인숙) 이러한 증거들을 고려하면 두 묘제는 형식면에서도 관련성이 있는 듯 하다. 

그런데 고구려의 전기 핵심지역인 혼강 중, 하류와 태자하, 혼하 상류의 요동지구에서 청동시대 고분이 많이 발견되었다. 萬發撥子(속칭 王八脖子) 유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왕면후는 “만발발자 4기는 고구려 조기의 토착유적”이라는 보고서를 긍정하고 “고구려 선대 유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묘제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을 살펴보면 적석묘는 고구려 성립 이전부터 존재해왔으며, 고조선의 일부 주민들에 의해서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인돌과 적석묘는 통칭 고조선이라는 역사시대에서 유사한 지역에서 한시적이고 부분적인 교차가 있었을 수도 있다. 북한은 로남리 유적은 기원전 3세기 이전의 문화층이며, 운평리 4지구 8호 무덤에서 나온 주머니식 쇠도끼는 기원전 3세기경의 유물로 인정하고 있다. 고구려가 고조선을 시간적 단절없이 그대로 계승했다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무덤의 기능이라는 측면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인돌은 제단과 무덤의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요녕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 가운데에는 조영위치도 좋고, 지석과 개석에 기호와 신상이 새겨져 있다. 북한지역도 은률의 관산리와 운산리, 배천의 용동리, 용강 석천산에서 조사된 지석묘 등은 조영상의 특징이 제단의 기능을 겸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고구려의 적석곶묘(積石串墓) Ⅱ,Ⅲ식에서 ‘묘설’이라는 형식이 발견되고 있다. 유실방지라는 토목공학적인 관점 외에 제사시설이라는 견해도 있다. 북한의 자강도 초산군 만포시 등지에서 고구려 적석묘들이 발굴되었는데, 역시 무덤 언덕에 낮은 제단 시설이 발견되었다. 천손사상과 조상숭배를 표현한 것이며, 이는 고인돌의 제의기능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장군총 등 12개의 집안 지역의 고분에서도 제단 시설이 발견됐다.

고분에서 출토된 무기와 토기도 중요하다. 고조선의 첫 시기는 기원전 8~7세기 미송리-강상시기라고 부르는데, 비파형 단검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두 번째 시기는 기원전 7~5세기 묵방리-루상시기로서 전형적인 것과 함께 변형 비파형단검 이 있다. 묵방리 류형의 변형 고인돌은 서북조선과 료동지방의 문화적 공통성을 잘 보여주며, 두 지역 사이의 련계가 다른 어느 지방과도 깊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미송리형 토기는 요동비파형 단검문화의 주인공과 관련하여 주목받게 되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로서 독특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미송리형 토기는 서쪽으로는 요하-대능하선에서 부터 한반도에서는 두만강 유역, 압록강 유역, 청천강 유역 그리고 대동강 유역 및 황해도 지역이다. 특히 압록강 유역은 신암리 미송리 용연리 유적이 있다. 그런데 미송리형 토기를 동반하는 청동기문화는 후기에는 주변으로 확산되어 길림의 서단산 문화와 대동강 유역의 팽이형 토기에도 영향을 주었다. 북한은 근래에 들어서서 요동중심설을 수정하면서 팽이형 토기를 주목하고, 이것을 고조선문화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북한의 박진욱은 비파형 동검문화를 고대 조선족 전체의 문화로 보고 있다. 그리고 분화를 시도하여 요동과 서북조선의 비파형 단검문화는 고조선문화, 즉 예족의 문화로 보고, 요서지방, 길림-장춘지방 등 양 지역의 비파형 단검문화를 맥족문화로 보고 있다.

세죽리-련화보류형유적은 서북조선문화로서 좁은 놋단검 관계 유적이 발견된다. 이 유적은 기원 전 1000년 전반기의 고조선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기원전 3~2세기의 고조선문화였다고 하였다. 집안에서 고구려 이전의 청동단검이 사각형 계단적석묘에서 발견되었는데, 상한은 기원전 3세기말이며 하한은 기원전 1세기초이다. 이렇게 동검이 비파형에서 세형으로 변해가면서 고조선 문화가 고구려로 계승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 외에도 고구려가 급속하게 대두한 것을 고조선 사람들이 제철기술을 고구려인이 이어받아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 생산력을 발전시킨 결과로 인식한다. 즉 고조선의 제철 주조유적인 세죽리-연화보류형 유적을 계승한 것이 고구려의 시중군 로남리의 단조유적이라는 것이다. 즉 기술의 계승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윤명철 : 2004 '고구려의 정신과 정책'(학연문화사)

           1996 「高句麗人의 時代精神에 대한 探究」'韓國思想史學' 7집, 한국사상사학회 .

           2002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에 관한 연구 1」'고구려연구' 13, 고구려연구회

           2004 「북한사학의 고대문화 인식과 현황」'한국 고유사상 문화론', 정신문화연구원 

           2006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에 관한 연구 2」' 단군학 연구' 14호, 단군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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