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는 왜 우리 땅일까? 간도가 조선, 청나라, 일본, 러시아에 중요했던 이유 | 간도 영토분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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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128회 작성일 23-05-30 20:46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UB2KhZjESj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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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간도는 왜 우리 땅일까? 간도가 조선, 청나라, 일본, 러시아에 중요했던 이유 | 간도 영토분쟁-2 


청나라는 1881년에 한족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켜 간도 일대를 개척시켰고, 1882년 4월에는 조선인들이 두 강을 넘어오는 행위를 막으라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그런데 5월에는 청나라의 이훙장이 조선과 미국이 수호통상조약을 맺는 것을 중재했고, 6월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위기를 느꼈던 민비와 척족세력들이 대원군을 축출시켜 달라는 요구를 빌미로 군대를 파병했다. 이후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고, 과거와는 달리 실질적인 속방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의 압박을 못견딘 채 간도에 거주한 조선인들을 1년 내에 송환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큰 실수였다. 다음 해에 들어와 청나라는 간도의 조선인들을 소환하라고 다시 강력하게 요구했고, 조선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어윤중을 파견했 는데, 그는 개혁파이며, 국제적인 경험을 갖춘 인물이었다.  


이 무렵에 간도 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청나라가 가한 부당한 정책들과 그로 인하여 피해입은 상황들을 모아 돈화현에 항의했다. 또한 정계비와 함께 국경문제의 핵심인 강의 근원 등을 자체적으로 조사했고, 그 결과물을 종성부에 제출했다. 때마침 도착한 어윤중은 이것을 보고, 관리들을 두 번 파견해 정계비를 조사했다.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는 내용이 새겨진 비의 탁본도 만들었으며 토문강을 답사한 후에 조정에 이러한 결과들을 보고했다. 결국 간도가 우리 영토라는 증거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사해서 확인한 것이고, 정부는 그 덕에 비로서 인지하고 자료도 확실하게 수집한 것이다.


고종은 1883년 5월에 어윤중에게 정계비를 조사하라고 파견했다. 그는 7월에 돈화현에 공문을 발송하고 조사자료 등을 청나라에 발송한 후에 정계비와 토문의 발원지 등을 공동 조사하자고 제의했다. 1884년에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후에 발언권이 다시 강해졌고, 1885년에는 간도 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의 농가를 소각하고, 무력으로 추방했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토문감계(土門勘界), 즉 감계회담을 요청했고, 두 나라는 9월부터 11월까지 4번에 걸쳐 제1차 감계회담을 열었다. 


조선은 문제의 핵심인 ‘토문’이 ‘두만강’과 다르다는 사실의 확인을 요구했고, 반면에 청나라는 정계비를 무시한 채 토문(土門)을 두만(圖們)강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중하와 청나라의 가항계는 공동으로 정계비와 주변을 조사했고, ‘목책’ ‘돌무지(석퇴)’ ‘흙무지(토퇴)’ ‘건천’과 ‘토문’ 등을 발견했으며,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들어가는 지금의 제 5도백하인 사실을 확인했으나 담판은 결렬됐다. 1948년 7월에 이 곳을 답사한 북한의 황산철은 1957년도에 발표한 글에서 이 곳에 돌각담이 106개 있었으며, 길이는 5,391m라고 썼다. 1887년 4월에 제 2차 감계회담이 열렸다. 청나라는 석을수(石乙水)를 잇는 선을 국경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간도와 백두산을 청나라 영토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중하는 지도 등 여러 자료와 증거들을 내놓고 토문과 두만은 다르다며 주장했다. 실제로 강희제가 국책사업으로 만든 J. B. 당빌의 『새중국지도』와 『황여전람도(黃輿全覽圖)』는 두 나라의 경계선을 두 강의 북쪽에 그렸고, 청나라도 이 사실을 인지했었다. 


물론 조선도 일부의 예외를 빼놓고는 동일한 인식을 가졌던 증거들이 지도들을 비롯해 연행록 등에 많다. 또 간도와 연관해서 영조 7년과 22년(1746년)에 주목할 만한 사실이 발생했다. 청나라에서 애하(靉河)와 초하(草河)가 만나는 지금 봉황성 남동쪽 아래에 망우초 카룬를 설치한다며 조선에 양해를 구했다. 명분은 조선인들의 인삼채취와 밀무역을 단속한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영조의 강력한 반발로 두 번 다 무산됐다. (육락현,  간도는 왜 우리땅인가?).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두 강은 청나라가 설정한 봉금지대의 남쪽이며 조선이 현실적으로 양해한 일종의 무인지대일 가능성이 높다. 


양 국의 주장이 계속 충돌되자 청나라 관리는 이중하에게 칼로 위협하려 했고, 이중하는 ‘吾頭可斷國不可縮 즉 내 머리는 잘릴수 있어도, 나라영토는 줄일 수 없다.’며 강격책을 고수했다. 결국 2차 감계회담은 결렬됐지만 국제정세는 조선에게 유리하게 변해갔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95년에 맺어진 시모노세끼 강화조약의 1항에서 ‘조선은 자주 독립국이다.’라는 조항을 수용했다. 이로써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됐고, 조선은 1897년 10월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면서 자주성을 표방했다. 이후 조선은 러시아의 남진에 대비하고, 간도 주민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국경조사를 재차 실시했고, 관리들을 파견해 조선인들의 호구와 경작면적 등을 조사하면서 보호와 소송을 담당하게 했다. 


1900년에 들어오면서 서간도는 평안도로, 동간도는 함경도로 편입시키고 세금을 징수해서  군사들의 훈련 등 운영비로 충당했다. 1902년 5월에 북간도 시찰사로 파견된 이범윤은 인구와 호구조사 등을 실시했으며, 포수 등을 모집해 ‘사포대’를 조직해 무장력을 갖추었다. 반발한 청나라가 조선군의 철수를 요구하자, 이에 굴복한 조정은 그에게 철수를 명했다. 하지만 그는 불복했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망명한 후에 훈춘 부근에 주둔했고, 이후 연해주로 넘어가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1904년에 들어와 조선의 지배권, 동아시아의 헤게모니를 놓고 결국은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 후에 러시아의 간섭으로 요동반도에 진출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압록강 하구 진출을 막은 용암포 사건 등에서 보이듯 이미 전부터 서간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강화회담에 미국의 포츠머드에서 열릴 때 강한 주장을 했고, 이로써 요동반도를 차지했으며, 장춘에서 여순을 연결한 동청철도 등을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았다. 이제 만주로 본격적인 진출을 추진하는 일본에게 무순의 석탄, 안산의 철 등 지하자원과 철도부설권 등은 매우 현실적인 관심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빼앗은 외교권을 이용해 ‘간도’를 만주로 진출하는 정책에 활용했고, 청나라는 이에 맞서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 마침내 1909년 9월에 소위 ‘간도협약’이 당사국인 조선을 빼놓고 두 나라 간에 맺어졌고, 그 결과가 지금껏 진행 중이다.


궁금하다. 일본은 만주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단계적 전략으로 간도를 일단 양보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왜 청나라는 멸망 직전에 이르렀는데도 불구하고 간도지역을 차지하려고 많은 양보를 해가면서 온갖 애를 썼을까? 훗날 만주는 점차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해졌고, 6.25때 중공군이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거꾸로 압록강을 넘었다. 지금 중국은 간도의 역사를 완전한 중국 영토와 역사로 바꾸는 동북공정을 계속하는 중이다.

   

한 시대마다 해결해야 될 일들이 있다. 이를 외면하거나 포기하면 결국 후손들에게 멍에를 씌운 부끄러운 조상으로 역사의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윤명철 :  "동아시아의 해양영토분쟁과 역사갈등의 연구." "역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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