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민족으로 만든 압록강은 고구려의 청계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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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123회 작성일 23-06-09 00:10본문
[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반도민족으로 만든 압록강은 고구려의 청계천이었다.
집안은 광활한 들판 같지도 않고, 부여지역의 구릉과 드넓은 초원도 아니고 장백산맥의 가지인 노령산맥의 산군들이 첩첩으로 쌓인 산골이다. 동서 10km, 남북 5km가 되는 폭이 좁고 긴 분지이지만 들판이 있고, 압록강이 곁을 흐르고 있어 농사짓기에도 편하고 좋다.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라서 그런지 이미 3, 4천 년 전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선사시대의 유적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고구려의 원류가 되는 맥족의 문화유적에 속하는 석기와 도기들도 압록강과 혼강 유역에서 발굴되었다. 고분들에서는 흙그물추, 낚시고리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그들은 홀본부여 또는 원조선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 다음에는 한족이 일시적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로서는 옛 땅을 수복한 것이다.
집안지역은 지리상으로 만주와 한반도 서북부를 자연스럽게 이어주기 때문에 그런 대로 교통의 요지이다. 압록강 수로를 적절하게 이용하면 마지막 항구도시인 서안평(신의주 단동지역)을 통과하여 황해로 진출할 수 있다. 국내성은 내륙의 산중에 있으면서도 바다로 연결되는 수로망을 지닌 일종의 항구도시이다. 궁궐의 남쪽 벽에는 압록강과 만나는 지점에 돌로 쌓은 부두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부분은 30m 정도인데 국내성의 성벽을 쌓은 수법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여진다(손영종).
2대 유리왕이 먼 거리를 이동하여 이곳까지 천도하였다면 주몽이 다스렸던 초기에도 이 지역은 물론이고, 압록강 이남지역도 영토로서 관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리왕 때는 압록강 이남은 수도권이었을 것이다. 압록강은 한반도와 대륙을 갈라놓은 지리적인 장벽과는 거리가 먼 조그만 강이었다. 국내궁성을 방비하는 큰 해자이며, 한강처럼 수도 앞을 흐르는 강이었다.
압록강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물빛이 오리머리색과 같이 푸른 색깔이라고 하여 ‘鴨綠’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하였다. 만주족어로는 ‘Yalu(邊界之江)’라 부르고 영어로는 ‘얄루(Yalu)’라 표기한다.『사기』 조선전이나 『한서지리지』에는 패수(浿水), 염난수(鹽難水), 마자수(馬訾水)’ 또는 ‘청수(靑水)’ 등의 이름도 나온다.
鴨綠江은 한반도와 만주를 구분짓는 강으로서 백두산록인 병사봉의 남쪽 기슭에서 시작한다. 하구인 단동시의 九連城(고구려 泊灼城)에서 수로가 189km인 애하(靉河)와 만난다. 한편 남쪽으로는 지류들인 허천강, 자성강, 장전강, 독로강 등이 있다. 압록강은 수심이 깊고 배들이 다닐 수 있는 수로인 통항 거리는 750km이다. 강 하류에는 하상도서(河上島嶼)가 많이 있다.
압록강 유역에서는 구석기문화, 신석기문화가 발달하였다. 집안시와 桓仁시의 혼강 중류와 부이강(富彌江)의 하류 양안 등에서 상당수의 신석기시대 유적을 발견하였다. 한반도쪽 유역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주거지와 토기·석기·골각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중강군 토성리, 시중군 심귀리, 노남리, 강계시 공귀동 등에서 거주지가 발굴되었다.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으로 시중군 노남리에서 야철지(冶鐵址)와 주거지 등이 발견되었다. 평안북도 압록강 까까운 지역인 운평리와 송암리 등에 대규모 적석총 고분군들이 밀집해있는데, 일부에서는 일본 전방후원분의 원형이라고 한다.
상세한 내용은 ‘윤명철 지음 “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의 3장 3절 참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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