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유민 디아스포라' 3 | 유라시아 오지로 끌려다니며 적국의 군인으로,적군의 여인으로, 황무지 개척한 노예로 살았던 고구려 유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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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890회 작성일 23-06-08 23:05본문
[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고구려유민 디아스포라' 3
유라시아 오지로 끌려다니며 적국의 군인으로,적군의 여인으로, 황무지 개척한 노예로 살았던 고구려 유민들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에서도 많은 포로들이 잡혀갔다. 반면에 수나라 병사들도 고구려에 포로로 잡혔다. 영양왕은 당시 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최초의 사찰인 아스까사가 창건되고, 불상이 완공될때 황금 300냥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고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포로 2명과 낙타 등을 왜국에 보낸 적이 있었다. 그 후 당나라의 태종이 파견한 직방낭중인 진대덕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을때 수나라의 포로들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렸다. 후에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수나라의 포로들과 그들의 시신을 묻고 세운 기념물인 경관을 철거해줄 것을 요구했었다.
645년, 고당(高唐)전쟁에서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요동성(遼東城) 전투에서 패배해 군인과 백성 등 7만여 명이 요주(요서·요동) 등으로 끌려갔고, 다시 1만4000명이 유주(幽州·베이징 일대)로 끌려가 정착했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함께 고사계 같은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669년 5월엔 20만 명(“자치통감”에는 3만8200호, “구당서”엔 2만8200호)이 끌려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또 679년에는 요동지역의 유민들을 하남(내몽골 오르도스)과 농우(간쑤성과 칭하이성 일대)로 이주시켰다. 이후에도 여러 번 끌려가서 나중에는 요동지역에 남은 사람이 2만 명이 못 될 정도로 줄었다(지배선, “고구려 백제 유민이야기”, 2006).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현장을 답사하면서도, 또 이번에는 유투브를 제작하면서도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도대체 그들의 삶은 어땠을까? 아주 어릴때 인상깊게 본 영화가 스파르타쿠스 였다. 그때 포로와 노예의 삶, 그리고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았는데, 나이가 들어 고구려를 공부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자주 떠올랐다. 1995년에 안시서에 올라갔을 때 떠올린 것은 승리의 함성이 아니라, 고구려인들의 불가시의함이었다. 요동벌의 바람에 나풀거리는 남보라색 도리지꽃을 보면서 애뜻함과 서러움이복받쳐 올랐고, 불현듯 떠오른 말이 '기적'과 '자유'였다. 자유의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승리였다. 그토록 자유의지와 자존심이 강한 고구려인들이 사슬과 줄에 묶여 끌려가는 광경, 살아남은 사람들이 흙먼지, 모랫바람,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과 들, 사막에서 당나라 군대의 옷을 입고, 또다른 이민족을 바라보는 눈길을 떠올리면서 다녔다. 모든 것은 존재이유가 있고, 존재가치가 있는데, 그들의 역사는 더더욱 가치가 있다. 조금 만이라도 그 들을 떠올린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망각된, 존재마져 지워진 고구려 유민들---
(윤명철 : "고구려 해양사 연구", 2003 /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외. "고구려의 꿈" 등 고구려 시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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