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조선의 흥망성쇠와 연동된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 고대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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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565회 작성일 23-06-09 00:53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iGh6W6yBU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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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위만조선의 흥망성쇠와 연동된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 고대도시 / koreanhistoryyoun 


역사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크게 다별하면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유형화시킬수 잉다. 미시적, 단대적, 국부적. 고립적인 관점과 거시적,장기적,범공간적, 연동적인이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 근대시대에는 전자의특성을 가졌다.  물론 지중해 세계나 초원 유목지역에서는 일찍부터 후자의 특성을 지녔다. 

우리역사는 고려 이후, 특히 조선시대는  체제이데올르기까지 동원해서 전자의 특성을 갖게끔 강요한 측면이 강하다. 특히 우리의 주변부 세력이며 경쟁과 갈등관계를 맺어온 중국과 일본을 우리 지배층으로 하여금 그런 역사관을 깆도록 음으로,양으로 작용했다.  

특히 근대에 들어와 세계관의 전세계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문명의 전환기에 우리 역사학은 일본 근대역사학의 강력한지도아래 기본틀이 만들어졌다.  때문에 우리 역사의 전반적인 특성은 물론 고대역사상을 왜곡시키거나 말살시킨 경우도 있다.

구체적으로 몇가지 거론하면 해양을 주목하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을 넘어 초원 유목공간이나 중앙아시아 공간과 연동시켜 해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유라시아의 여러공간 , 문화와 연동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워만조선의 성립과 은 아주 강하동돼서 나타났다. 위만조선의 건국과정은 초원유목민족  흉 노의등장과  월지의 중앙아시아  동부로 후퇴. 진과 흉노의전쟁요서와 화북일부의  연나라와 연동됐다.

심지어는 원조선문명권이 붕괴가 되고, 부여 고구려를 중심으로 수많은 정치체들이 생기고, 고구려가 초기에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데에는 흉노의 역할이 적지 않았었다.

원조선과 연은 국경을 마주하면서 교류와 갈등을 계속했을 것이다. 그런데 『위략』에는 “기원전 3세기 초 무렵에 연나라의 장수인 진개(秦開)가 조선의 서쪽을 쳐서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국경을 삼았다.” 라는 기사가 있다. 원조선의 서부 국경선 이동하였고. 만번한(滿番汗)이 조선과 연나라 간의 국경이 된 것이다. 만번한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지만 원조선은 그 곳부터 서쪽으로 2000 여리 또는 1000 여리까지가 영토였던 것이다. 그 때 연나라가 설치한 요동군은 현재 요서와 하북 일대이다.

또한 그 시기에 연나라는 동호를 공격하여 1000여리의 땅을 빼앗았다. 이때 동호와 조선이 같은 존재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정치적인 상황과 시료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면 동일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중국의 진·한나라 시대, 북방에서는 흉노가 번성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기원전 230년 경에는 조선에서 준(準)이 왕위에 올랐으나, 30여 년이 지난 후인 기원전 194년경에는 망하고 만(滿)왕조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동아시아 세계는 위만조선과 한(漢), 흉노(匈奴), 동호(東胡)라는 ‘4각 구도’ 또는 위만조선, 한, 흉노라는 ‘3각 구도’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시대에 흉노와 대결할 수 있는 정치체 또는 국가는 ‘동호(東胡)’라는 일반명사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 ‘동호(東胡)’라고 기록된 존재의 정치적인 성격과 국가 명칭은 알 수가 없는데, 원조선과 연관이 깊은 것은 분명하다. 


윤명철 지음: 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의 제 5장과 제 8장 참고 / 유라시아 세계와 한민족 / 유라시아 세계의 이해와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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