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노래 1 | '광개토태왕' (광개토태왕비 년도별 탁본 및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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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564회 작성일 23-05-31 23:41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HYx-izsrKq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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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고구려노래 1 | '광개토태왕' (광개토태왕비 년도별 탁본 및 사진)

고구려 노래 1. 광개토태왕 (작사 : 윤명철, 작곡ㆍ노래 : 한치영, 제작 : 대원레코드, 2001년 ) 


만주에는 광개토대왕비가 서 있어. 

스무 자 훨씬 넘는 돌비석이 서 있어. 

아시아 제일 큰 금석문 천 칠백 칠십 오자 새긴 비

영웅 광개토대왕비가 서 있어. 

오 천년을 말하고 있어.

우리는 하늘의 자손 밝히고 있어

하늘의 뜻 펴기 위해 고구려를 세웠노라

광개토대왕이 말하고 있어 

역사를 전하노라

돌아오라 고구려

용기를 전하노라

일어서라 겨레여

예전처럼 손잡고 서라

굳게 뭉쳐 하나되어라

큰 세상 꿈꿔라

광개토대왕이 말하고 있어 (겨레여 ~).


*광개토태왕

 난 한 인물을 그린다. 때론 한밤중에도, 때론 망망대해의 폭풍우속에 서서도, 또 때론 초록물로 바랜 듯한 노을이 번져가는 몽골의 대평원과 알타이의 산록에서도.

마음이 아파올 때는, 역사의 문신이 흉터처럼 가려워올 때는 참을 길 없을 정도로 그를 그리워한다. 

광개토태왕. 

그는 18대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할아버지가 고국원왕이고, 소수림왕은 큰 아버지이다. 12살에 태자가 되었고, 392년에 18세의 나이로 등극하여 22년간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영토를 넓혔다. 자의식이 강했고, 군사전략에 탁월했으며, 세계국가시대를 개척했던 태왕, 즉 왕 중의 왕인 태왕이다. 

'삼국사기'는 태왕의 이름은 ‘담덕(談德)’ 시호는 ‘광개토왕’이라고 하였다. 담덕은 덕을 이야기한다는 다소 철학적이고 인간인 이름이다. 그는 역사로부터 몇 가지 위대한 칭호를 부여 받았다. 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그리고 모두루총의 묘지석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聖王)’, 경주의 호우총에서 발굴된 청동합 명문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고 하여 태왕을 왕으로 격하시키는 우를 범했다. 여러 왕들을 거느린 왕 중의 왕이 태왕 혹은 태왕이다. 

그러면 태왕이 추구한 거대한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고구려의 발전전략은 무엇일까?그가 평생을 걸려 추진한 정책은 정치외교의 중핵(core), 즉 세력들 간의 균형과 조정역할을 확실하게 수행하는 일이었다. 태왕은 판갈이하는 국제질서의 변화와 미묘한 변화와 복잡한 시대상황을 간파하는 통찰력을 지녔다. 국제질서의 지리적인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영토 확장이 전술의 핵심임을 깨닫고 군사력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동서남북으로 수 천 리를 이동하면서 대륙의 남부와 한반도 중부 이북의 거대한 육지영토를 차지했으며, 거기에다 황해중부 이북과 동해중부 이북의 해양영토를 확보해 명실 공히 해륙(海陸)국가의 위용을 갖추게 하였다. 이어 중핵(core)에서 육지질서를 기본으로 해양질서를 수용하는 복합적인 정책을 구사했다. 전략적인 거점을 곳곳에 확보하여 질서의 기본축(軸)을 세우고 단계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을 연결함으로써, 자국 중심의 거대한 망(網, net)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동아시아 삼각축의 하나이면서, 동아지중해의 중핵국가로서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그리고 문화 등 다방면에서 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을 토대를 완성했다. 태왕이 추진하고 성공을 거둔 전방위군사작전과 남진정책은 단순한 영토의 팽창, 인구의 획득이란 차원을 넘어 동아 질서의 재편을 염두에 두고, 그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곧 동아지중해 중핵조정역할의 토대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 광개토태왕비 

때때로 존재 자체만으로도 역사의 장중한 무게와 엄숙함, 그리고 헤아리기 힘든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있다. 사람도 그러하고, 나라도 그러하고, 유물도 그러하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성리학자들은 ‘용비어천거’와 고려사에서 이성계가 국내성을 금나라의 황성이며, 광개토태왕비를 ‘금나라 황제비’라고 보았다. 1877년에 關月山이라는 중국인이 이 비를 발견했고, 1882년에 ‘사까와’라는 첩보군인이 임시탁본을 떠서 일본으로 갖고 갔다. 일본 참모본부는 몇 년 동안 비밀 연구한 끝에 1889년 광개토태왕비라고 공표하였다. 네 면을 돌아가며 고구려 특유의 웅혼하면서도 정갈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필체로 1775자 이상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문장은 3단락으로 구성됐다. 첫 부분은 고구려의 시작, 건국자인 추모(주몽)와 왕들의 가계 등 정체성을 표현하고, 비를 세운 과정 등을 서술했다. 둘째 부분은 본문에 해당된다. 태왕이 22년 동안 활동한 내용과 정복한 영토, 순수한 일 등을 연대순으로 기록했다. 셋째 부분은 비와 능을 지키는 수묘인들과 관리규정을 기록했다. 

무심한 역사, 망각의 역사 속에 비문은 훼손됐고, 글자 상태 또한 좋은 편이 아니다. 석재가 무른 데다가 표면과 사면의 선이 울퉁불퉁하고, 돌 색도 어두침침할 정도로 진하기 때문에 글자를 분별하기가 힘들다. 또한 초기 연구 자료는 사까와가 떠온 임시탁본인 ‘쌍구가묵본’이었으므로 비문을 조작하거나 왜곡시키기에 적당했다. 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 일 중 일 간에는 숱한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고, 또 공고화하기 위해서 이 비를 자국에게 유리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가장 논쟁이 심한 내용은 1면의 왼쪽 중간 아래부분인 소위 신묘년 조항이다. ‘--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 이 문장을 일본인들은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었다.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가라 신라를 공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을 하였다. 즉 문장을 ‘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 百殘??新羅 以爲臣民以’라고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그 무렵에 전개된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를 고려한다면 설득력이 별로 없다. 그 무렵에 일본은 그들의 희망사항과는 달리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거나 능력이 없었다. 소국들의 집합체였다.

 정인보 선생은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고구려)渡海破百殘? ? ? 羅 以爲臣民--’ 라고 해석하였다. 바다를 건넌 주체가 고구려가 돼서 우리에게 유리한 해석이다. 이후 북한과 남한의 일부에서는 약간의 차이들이 있어도 대체로 이 견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 후에 여러 종류의 탁본들이 공개되었고, 해석들도 다양해졌다. 이진희씨는 일본이 몇 개의 귀절을 왜곡하거나 글자를 위조했다고 주장했다. 소위 ‘임나일본부설’은 이 비문의 신묘년 조항의 해석과 관련 깊다. 


그런데 이 비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대왕을 찬양하는 기념비라고만 단정짓기에는 다양하고 복잡한 의미들을 담고 있다.왜, 무슨 목적으로 비를 세웠는가? 비를 통해 알리고자 한 내용은 무엇인가? 이 것들을 살펴는 일이 필요하고, 이것이 장수왕과 고구려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광개토태왕비는 5세기를 열고 고구려 중심의 신질서를 개화시킨 광개토태왕의 정책을 계승하고, 이를 완결시킨 장수왕이 새로워진, 새로워질 고구려 자체를 반영하는 상징물로 세웠다. 고구려의 역사, 정신, 후세에게 전달하자 의미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두 지도자의 역사관과 세계관 등이 응축되었고,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기본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의 역할을 목표로 세웠다. 그리고 ‘고구려미’를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했다.


윤명철 지음 “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외 

        시집 “고구려소리” 외 

        논문 ‘광개토태왕비, 미(beauty) 론 (logic) 의미(meaning)’ ‘단군신화 해석을 통한 장군총의 성격 이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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