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 비판 2부 | 백제 칠성신앙과 신단수의 상징물, 일본 초치검의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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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608회 작성일 23-06-09 00:53본문
[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임나일본부설 비판 2부
백제 칠성신앙과 신단수의 상징물, 일본 초치검의 원형?
칠지도의 논쟁은 한일 고대사의 특별한 성격을 규명하는데 필요하다. 그와 함께 왜 이런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형태의 칼이 만들어졌고, 어떤 의미 즉 상징을 표방하는가? 그 본질을 파악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1) 형태
칼의 기능과 의미는 모든 모든 존재물이 그러하듯이 무기라는 실용성이 우선이다. 하지만 단순한 용도가 아니라면 미학도 고려해야 하고, 더구나 국가나 시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물건이라면 반드시 담겨있는 ‘의미’도 고려해야 한다. 서양문화에서는 ‘엑스카리버’나 ‘롱기누스의 창’ 등이 상징성이 강한 칼이다. 우리는 정치적인 의미로서 단군신화에 등장한 천부인 3개인 거울 칼 방울에 칼이 있다. 또 유리왕이 아버지 고주몽이 신표로서 숨겨놓은 반으로 자른 칼이 있다. 칼은 종교적으로도 의미를 내포했다. 한국 무당들은 3개의 무구 가운데 하나로서 신칼을 갖고 있으며, 동북아시아의 샤먼들도 신칼을 소유했다.
현재 나라현 이소노가미 신궁에 보관된 ‘칠지도’는 1개의 몸통과 6개의 가지로 구성됐으므로 일본서기에 등장한 칠지도가 분명하다. 그런데 모양은 분명이 나무 형태이다. 나무 형태가 가진 상징은 ‘생명성’이다. 남근신앙과 연관이 있다. 또한 나무는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유일하고 확실한 존재로 인식했다. 즉 우주산의 중심인 우주목으로서 모든 문화권에서 수목숭배신앙 또는 우주목 신앙은 있었다. 시베리아의 알타이어족은 나무에 정령이 살고 있다고 믿었으며, 둘레에 금줄을 쳐놓아 경계로 삼았다.
그런데 왜 ‘7가지’일까?
2)의미
문화에서 ‘수(數)’는 독특한 위상, 다양한 상징과 기호의 역할( 조르쥬 이프라, 알프레드 레이니 등) 을 했다. 고대에는 수가 단순한 부호를 넘어 사상을 지배하고 모든 움직임의 기본이 될 정도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숫자는 '3'과 '7'이다.(숫자 문명사전) 특히 샤머니즘에서는 3과 7이 가장 중요한 숫자이다. 7은 단군신화의 '三七日’처럼 3과 짝을 이루어 중요한 생명탄생의 수리로서 작용했다. 3층 구조인 장군총도 각층 마다 7계단씩으로 되었다. 고구려인들은‘북두칠성’을 고분벽화에 그렸다. 우리 민속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3․7' 즉 '21'일 동안 문 앞에 왼새끼로 인줄을 만들어 외부인들의 출입을 금했다.
또 칠성신앙이 발달했는데, 칠성할머니는 아이를 7살까지 보호하는 신의 역할을 담당했다. 시신을 눕히는 판도 칠성판이라고 해서 칠성이 그려져 있다. 고인돌이나 암각화에도 칠성이 새겨져 있었다. 주몽이 아들이 찾도록 숨겨놓은 부러진 칼은 7모가 난 돌 위 소나무 밑에 숨겼다. 이러한 관점에서 ‘칠지도’의 상징과 의미, 논리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천손인 니니기노미코도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 ‘거울 칼 곡옥’이라는 삼종신기를 갖고 왔다. 이때 칼은 ‘초치검(草薙劍, 쿠사나기 검)’일 가능성이 크다. 태양여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가미와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실패한 스사노노미꼬도는 8머리가 달린 구렁이(오로치)와 싸우다가 꼬리 안에서 칼을 꺼냈다. 첫째 천황인 신무는 동정할 때 신검을 받아서 활용했고, 후에 아쓰다 신궁에 모셨는데 초치검이다. 천황의 즉위식 때 사용된다. 칠지도는 이 초치검 또는 유사한 칼일 가능성이 많다. 실제로 일본의 고대 고분에서는 일반적으로 삼종신기가 동반출토되며, 칼은 항상 출토된다.
고대사회에서는 칼 왕관 등의 신물을 하사해서 지배권을 위임하거나 인정하는 절차로 삼았다. 충주고구려비의 내용을 보거나 백제 영역의 여러 지역에서 금동관들이 발견되는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와 백제와 일본열도의 체제를 고려할 때 칠지도 등은 백제가 하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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