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의 실체와 비판 1부/ 일본의 주장과 일본서기, 광개토태왕비문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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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453회 작성일 23-06-09 00:53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p6R1zpyjA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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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임나일본부설'의 실체와 비판 1부

일본의 주장과 일본서기, 광개토태왕비문 해석


‘임나일본부설(미마나 미야께, 任那日本府說)’은 4c경 야마도 정권이 한반도에 출병하여 신라를 정벌하고,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방을 정복하여 562년에 신라에 의해 파멸될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임나일본부’가 존속했다는 논리이다. 이 설은 ????니혼쇼키(日本書紀)????에 근거하였으며, 18c 이후에는 국학자들에 의하여 확실한 믿음으로 되었고, 특히 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 일제는 이 설을 입증할 목적으로 광개토태왕 비문이나, 칠지도(七支刀) 또는 중국의 사서 등과 고고학적 유물 등을 동원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진고후(神功) 황후 49년(AD 369, 일본 사학계의 견해)에 야마도왜가 임나에 처음 출병하여 평정한 후 백제에게 조공을 받았으며, 계속해서 주둔했다고 한다. 그리고 AD 463년부터는 ‘고쿠시(國司)’ 또는 ‘니혼부(日本府)’를 두어 미마나왕(任那王)과 함께 경영하였으며 AD 562년에 신라의 임나관가가 파멸할 때까지 백제 복속과 함께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신라, 백제는 AD 646년까지 임나의 몫까지 왜에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이 같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토대로 한 임나일본부설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한국 측의 사서에는 기록이 없다. 둘째, 8년 먼저 편찬된 ????고지키????(712년)에도 언급이 전혀 없다. 셋째, ????일본서기????가 가진 사료적 가치에 대한 신빙성이 적다. 이 책은 새로운 질서와 천황의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이 강하다.  저자인 오호노야스마로(太安萬呂,혹은 太安麻呂, 太는 존칭임)는 백제계 출신이다. 그렇다면 신라 중심의 한반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작용했고, 백제와 일본의 역사가 혼재됐을 가능성도 있다. 넷째, ‘일본’, ‘고쿠시’라는 용어는 7C 이후에 나 나타난다. 따라서 소위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가 편찬될 당시 혹은 후대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인들은 이 설의 타당성을 입증하려고 광개토태왕비문의 내용을 들고 있다. 

문제가 되는 내용은 대체로 3가지 정도로 압축이 된다.

첫째, 일본인들은 신묘년 조항을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었다.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가라 신라를 공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을 하였다. 신묘년은 391년이 맞다. 그 무렵의 동아시아 역학관계를 고려한다면 일본 측의 주장은 설득력이 별로 없다. 왜 세력들은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거나 능력이 없었고, 조그만 지역조차 통일하지 못한 소국들의 집합체였다. 한편 정인보선생은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고구려)渡海破百殘? ? ? 羅 以爲臣民--’ 라고 해석하여 바다를 건넌 주체를 고구려로 해석했다. 

둘째는 영락 9년조와 10년조이다. 왜가 신라 영토에 가득찼다는 기록이다. 즉 “九年己亥百殘違逝與倭和通--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      十年庚子派遣步騎五萬王求新羅---倭滿其中--來背急退至任那加羅從拔城卽歸服安羅人戌兵---”

셋째는 ????릉비문???? 14년조의 ‘十四年 甲辰而 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連船,□□□,王躬率往討 從平壤□□□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殺無數.’ 이다. (백제와 연합한)왜가(수군을 동원해)대방계를 침입하고, 대왕이 직속군(王幢)을 보내어 격퇴한 내용이 있다.


대세론의 입장에서 임나일본부설과 광개토태왕 비문의 내용에 대해 접근하려 한다. 4C 말부터 5C 초에 이르는 시기에 화북지방은 5호에 의한 16국의 흥망이 거듭되었고 남쪽에는 동진이 있었다. 420년에 송(宋)이 건국하면서 남북조 시대가 되어 589년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대분열 시대를 겪었다. 이러한 시대인 4C 말에 광개토태왕은 백제와 수차례 전투를 벌였고, 즉위 6년(396년)에는 수군을 투입하여 백제의 58성 700여 촌을 탈취했다. 고구려가 압박하고, 신라가 동조하며, 동진과 외교관계가 힘들어짐에 따라 백제는 왜와 동맹을 맺었다. 한편 태왕은 신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할 목적으로 출병했다. 또 태왕 18년에 신라의 실성왕(7년)이 대마도를 정벌하는 계획을 세우다가 중지했었다. 신라 영내에 고구려군이 주둔해있었으므로 고구려는 왜 지역을 공격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404년에는 백제와 왜 연합군이 수군으로 황해도 지역까지 침입하였다. 고구려는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상 일본열도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 시마네(島根) 지역의 이즈모(出雲) 등에서 고구려 문화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보아 고구려는 동해남부나 남해동부를 통해서 일본열도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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