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시압 성 터 / Afrosiab Castle / Uzbekistan Samarkand /고구려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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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367회 작성일 23-06-09 00:53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9w4HhprEh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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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아프로시압 성 터 / Afrosiab Castle / Uzbekistan Samarkand /고구려 사신 


‘사마르칸드’는 우즈베키스탄의 제2 도시이면서, 서쪽에 있다. 고구려와도 교류했던 ‘강국(康國)’의 수도였다. 사마르칸드라는 지명은 산스크리트어의 ‘스므르그(smrg)’라는 명칭에서 유래하였으며, ’교차로‘, ’상인들의 만남‘, ’상업이 활발한 장소‘ 등의 의미이다. 

이 지역은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문화가 발달했다. 기원전 7세기에 도시가 건설되었고, 기원전 5세기에는 아프라시압성이 만들어졌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기원전 329년에 동진해서 치열한 전투 끝에 사마르칸드를 점령했다. 이때 그와 함께 온 역사가들은 이 도시의 이름을 ‘마로칸드(Marokand)’라고 기록했다. 기원전 60년에 이르러 사마르칸트는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캉(Qang, 康), 파르카나-페르가나(Parkana-Fergana), 토하리스탄(Tokharistan) 등의 나라로 발전한다.  소그드 지역에서는 알렉산더 시대의 동전들과 월지인들이 제작한 쿠샨왕국의 동전들이 다량으로 출토된다. 하지만 240년경에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멸망했다. 

소그드 지역은 매우 번영하여 건축, 수공업, 상업, 예술과 문화가 크게 발전한다. 그리고 실크로드가 본격적으로 발달한다. 소그드의 상인들은 중국, 예티수(Yettisuv, 현재의 타지키스탄 일부)를 포함한 

키르기즈스탄 지역)와 동투르키스탄에 상업 식민지를 건설하여 상업과 수공업을 발달시켰다. 소구드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상인들은 사마르칸드인들이었다. 중국에서 사마르칸드는 강국(康國)이었으므로 그들은 ‘강’씨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사마르칸드는 투르크(Turk, 突厥) 제국의 지배를 받아 매우 확장되었고, 시내에는 거대한 성벽과 궁전, 사원들과 귀족들을 위한 주택들이 건축되었다. 구당서의 강국전에는 이렇게 기록됐다. “강국(康國)은 수 양제(604~617)때 왕이 서돌궐의 엽호가한의 딸을 아내로 맞아 서돌궐에 복속하였다.” 이들은 수양제(605~617년) 때에 처음으로 사절을 파견하고 물건을 바쳤으나 곧 단절되었다. 하지만 만여 명의 소그드계 돌궐 상인들이 중국에 거주하였다.  이미 이 전부터 고구려 문화에 강한 영향을 끼쳤고, 일부 상인들은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소그드 상인들은 상품을 중국, 한국(고구려, 신라, 발해), 일본, 서쪽으로 아랍 국가들과 비잔틴 제국까지 운반해 갔다. 자연스럽게 소그드어는 실크로드에서 국제 통용어로 기능했다.

그런데 654년에 아랍 세력들은 사마르칸드 부근으로 접근해왔고, 중앙아시아에서는 투르크족과 아랍 세력 간의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결국 사마르칸드, 부하라를 포함한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일대가 아랍의 수중에 들어갔지만, 두 도시의 주민을 뺀 나머지 소그드인들은 아랍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658년에 서투르크 제사마르칸드를 중심으로 한 실크로드국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으며, 중앙아시아는 당나라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이 무렵에 사마르칸드의 통치자는 ‘바르후만

(Barxuman)왕’이다. 아프라시압성터에서 발견한 궁전 벽화에는 그가 외교 사절들을 영접하는 장면들이 있다. 당, 인도, 이란, 토하리스탄, 초치, 그리고 고구려 사신이 있다. 그러나 아랍 군대가 712년

에 사마르칸드를 포위했고, 소그드의 왕 구락(Gurak)은 초치의 왕, 페르가나의 왕, 투르크의 카간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연합군이 결성됐다. 하지만 지원군은 사마르칸트에 도달하지 못했고, 결국 사마르칸드는 아랍에게 점령당했다. 그 후 사마르칸드는 9~10세기에 페르시아의 사만 왕조 때에 큰 도시가 되어 매우 번성하였고, 다시 11~13세기에는 투르크계 종족 티무르 제국의 판도들의 지배 아래 있다가 13세기에 호레즘 왕국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1219년에 칭기즈칸이 거느린 군대가 중앙아시아에 진출하였고, 1220년 봄에는 마침내 사마르칸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몽골군에게 저항했지만, 1만 명의 사마르칸드인들이 전사하면서 도시는 점령당했다. 그리고 현재 사마르칸드의 기본틀을 완성한 티무르 시대를 맞았다.


윤명철 저서 : 유라시아 세계의 이해와 활용 / 유라시아 세계와 한민족 / 천산을 넘어 알타이로드를 찾아가는 길


'Samarkand' is the second largest city in Uzbekistan and is located in the west. It was the capital of a ‘gang-guk (康國)’ that had exchanges with Goguryeo. The name Samarkand is derived from the Sanskrit word 'smrg', which means 'crossroads', 'meeting of merchants', and 'place where commerce is active'.

This area was first cultured by the Persians. A city was built in the 7th century BC, and Afrasiab Castle was built in the 5th century BC. Alexander the Great of Macedon defeated the Persians and marched eastwards in 329 BC, capturing Samarkand after a fierce battle. At this time, the historians who came with him recorded the name of the city as 'Marokand'. By 60 BC, Samarkand was incorporated into the Greco-Bactrian kingdom, and then developed into countries such as Qang, Parkana-Fergana, and Tokharistan. In the Sogd area, coins of the Alexander era and coins of the Kushan Kingdom made by the Wolji people are excavated in large quantities. However, it was destroyed by Sassanid Persia around 240.

The Sogd region is very prosperous, with great development of architecture, handicrafts, commerce, arts and culture. And the Silk Road develops in earnest. Sogd's merchants were the Chinese, including the Yettisuv (now part of Tajikistan).

They established commercial colonies in Kyrgyzstan) and East Turkestan to develop commerce and handicrafts. Among the Sogudians, the representative merchants were the Samarkands. In China, Samarkand was a strong country, so they were given the surname Kang. After that, Samarkand was greatly expanded under the rule of the Turkic Empire, and huge walls, palaces, temples and houses for nobles were built in the city. This is recorded in Gutangseo's Gangukjeon. “During the reign of Emperor Yang of Sui (604-617), the king of Kangguk married the daughter of Yeophogahan of Seodolgwol and submitted it to Seodolgul.” They dispatched envoys and offered goods for the first time during the Suiyang Festival (605-617), but it was soon cut off. However, about 10,000 Sogdian merchants lived in China. It has already had a strong influence on Goguryeo culture from before, and it is highly likely that some merchants lived there. Sogdian merchants carried their goods to China, Korea (Goguryeo, Silla, and Balhae), Japan, and west to the Arab countries and the Byzantine Empire. Naturally Sogd functioned as an international lingua franca on the Silk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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