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도시인 고구려 안학궁과 대성산성, 대동강 보통강이 둘러싼 평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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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567회 작성일 23-06-09 00:53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9XkpVrUu2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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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항구도시인 고구려 안학궁과 대성산성, 대동강 보통강이 둘러싼 평양성 


안학궁과 대성산성

평양성,  항구도시 


평양지역은 고구려가 초기부터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곳이었다. 

 동천왕은 247년에 동평양으로 천도를 고려했는데, 그가 직접 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주민과 종묘 사직을 옮긴 것은 분명하다. 거지왕자라 불리우는 15대 미천왕도 평양지역에 관한 관심을 기울였다. 장수왕의 증조부인 고국원왕은 백제의  북진을 막고 남진정책을 취하면서 평양지역을 전진거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백제 군대와 평양성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광개토태왕은 등극하자마자 경기만 지역을 공략하고 백제 진사왕의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평양에다 9개의 큰 절을 창건했다.  


삼국사기 동천왕 28년조는 ‘王儉仙人遺宅’’이라는 문장이 있다. 원조선의 땅, 즉 단군의 유택, 묘지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고구려인들에게 평양지역은 조선의 정통성을 선언할 수 있는 유력한 지표 가운데 하나였다.

또 하나 실질적인 이익이 있었고, 국가발전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는데 적합했다. 수도는 정치나 외교의 중심지이어야 한다. 교통과 통신의 인프라가 잘 구축돼서 이점을 최대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국제질서의 변화로 교섭의 주요 대상인 북위나 남쪽의 송과 교섭하려면 해로를 통해야만 했다. 평양지역은 육로교통뿐 만 아니라 내륙수로교통에도 적합하다. 안학궁에서 평양성으로 이전한 다음에는 다경문에 갑문시설을 만들고 중성에 있는 정양문까지 약 3km 구간에 운하를 건설하여 시내까지 배를 끌어들일 수가 있었다. 

또한 평양은 황해해상권을 확보하고, 해상로를 통제하는 데도 적합한 도시이다. 평양을 내항(내륙항구)으로 삼고 대동강 하구(남포)에서 바다로 출항하면 안전하게, 짧은 거리를 항해하여 남북조와 교섭할 수 있다. 또한 백제가 북위 정권이나 남쪽의 송나라 등과 교섭하는 것을 차단하고 황해해상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평양지역은 국방상 안정성 높다. 고구려는 국경선이 3개 전선으로 구성되었다. 북부에서 유목민족들이 기마군단으로 공격하면 수도권이 위험하다. 중국인 서부전선의 경우도  상황은 거의 유사했다.  그런데 평양 지역은  전선과 수도 간의 거리가 멀어서 안전했다. 반면에 남쪽으로 백제․ 신라 가야를 적극적으로 압박하고, 유사시에는 군사적으로는 신속한 대응체제를 갖추는데도 유리하다. 평양은 문화도시의 기능도 충실할 수 있었다. 이미 선사시대부터 문화가 발달했고, 또 국제적으로 교류가 활발했으므로 문화도시의 역할에 적합했다. 북한은 1991년 이후에는 주체사관을 주창하면서  ‘대동강 문명설’을 주장하고 있다. 


안학궁은 방어성인 대성산성과 더불어 전기 평양시대의 도성 체계를 이루었다.  일본학계에서는 전기 평양시대의 도성체계를 대성산성과 안학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성산성과 청암리토성으로 본다. 

대성산성은 동, 서, 남쪽에 크고 작은 강들이 자연 해자를 이루고 있다. 대동강을 따라 서해와 교통이 편리하게 되어있어 군사, 경제, 교통 상의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길이가 7,076m로서  20개의 성문과 65개의 치성, 170개의 못자리, 30여 개의 집 자리가 발견되었다.남쪽 장대인 소문봉에 올라서면 성 아래의 安鶴宮 터가 보이며, 강과 벌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이 지역에서 고구려  절터, 우물 터, 대동강 나무다리 터와 많은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안학궁에서 옮긴 평양성은 6세기 중․후반에 쌓은 고구려의 장안성으로 현재 평양시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평지성과 산성으로 구성된 고구려의 도성체계를 승화시켜 양자를 하나의 성으로 결합시킨 전형적인 도성이다.  대동강과 보통강이 싸고돌아 자연해자를 만들었고,  중간 중간에 인공문을 만들었다.  다경문의 갑문으로 물을 끌어들여 정양문까지 운하를 건설했다. 북쪽으로 금수산 모란봉을 기점으로 서남으로 을밀대, 만수대를 타고 보통강을 따라 뻗다가 보통강과 대동강이 합치는 목에서 동북으로 꺾이어 대동강을 거슬러 다시 모란봉으로 이어지며, 총 둘레가 6km에 달한다. 내성, 중성, 외성, 북성으로 나뉘어진  복합적인 구조로서 모든 성벽들을 합치면 총 연장이 23km인  난공불락의 성이다. 

 평양성은  6세기 후반에 처음 쌓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에서 1993년부터 4년에 걸쳐 발굴한 끝에 중성 서벽의 아래에서 고구려 이전 시기의 성벽을 발견했다. 또한 고조선의 이른 시기의 유물들인 팽이그릇조각, 반달칼 등도 출토됐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평양성을 쌓으면서 중성은 고조선 시대의  성 위에 덧쌓고, 규모를 크게 확장하면서 외성과 내성 및 북성을 새로 쌓은 것으로 추정한다.(안병찬․최승택, 「새로 발굴된 평양성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8-4.)  


신형식, 최근영, 윤명철, 오순제, 서일범 지음: 고구려 산성과 해양방어체제, 2000

윤명철;  고구려 해양방어성 연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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