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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특집 - 2부 만주벌 이름 없는 독립전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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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841회 작성일 23-05-21 06:27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b4AmOqWn8Z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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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특집

2부 만주벌 이름 없는 독립전사들 


■ 독립군 최초의 군영, 백서농장 

1914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백두산 깊은 산 속에 정예부대 양성을 위한 특별 군영을 마련했다. 실질적인 항일무장투쟁 준비를 위해‘백서농장’이라는 독립군 비밀기지를 세운 것이다. 사방 200리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 속에 위치한 백서농장에서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385명이 입영하였고 대일 무장투쟁에 대비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극한 상황에서의 경험은 이후 항일 독립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 신흥무관학교 출신들, 무장 항일투쟁의 선봉에 서다!

1919년 봄 3.1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의 함성은 국경 너머 만주벌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0년 12월 밀양 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국내외 무장 항일 투쟁의 열기가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조선총독부 파괴와 요인 암살, 일제의 심장부를 강타한 이들은 바로‘의열단’이었다. 의열단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김원봉이 단장으로 추대되어‘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목표 아래 암살과 일제 기관을 직접 타격하여 민중의 힘을 이끌어 내겠다는 명확한 이념과 목표를 가진 독립운동단체였다. 


 ▶독립군 부대 첫 승전보를 울리다!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항일 무장 투쟁의 첫 승전보를 타진한 봉오동 전투. 당시 독립군 부대는 대패한 일본군 지휘관인 야스카와 소좌가 기록으로 남길 만큼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야스카와 소좌는 독립군이 사격과 지형지물에 능하고 전투 의지 또한 상당히 강했다고 평가했다. "적(독립군)은 상당히 훈련되어 700~800m 거리에서도 사격을 했고 지형을 이용한 방어가 상당하고 전투에 용감히 임함."


■ 만주벌 항일의지를 꺾어라! - 일본군의 불령선인 대토벌작전

날로 더해가는 독립군의 열기를 의식한 듯 일본 또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일본은 경찰과 정규군으로는 부족해 중국 산세에 밝은 현지인을 포섭하고 만주에 일렁이는 항일의지를 잠재우려고 한다. 그러한 가운데에는 충격적인 사실도 포함돼 있다. 일본 낭인 나카노가 중국 마적과 손을 잡고 만주 지역 조선인과 독립군 학살에 나선 것이다. 일본 낭인 나카노의 수기인 [천락각서]는 이 당시의 무참했던 살상의 진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 무장독립운동사의 빛나는 승첩, 청산리 전투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한 전투상황 보고서를 보면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사기록에 따르면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은 1,200여 명의 전사자와 2,1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최전선에서 온 몸으로 전투를 치른 결과였다. 이들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 사령관        김좌진

● 사령관 부관   박영희 / 대한제국 육군 부위 출신, 신흥무관학교 교관 역임

● 연성대장      이범석 / 중국 운남성 육군강무학교 기병과 졸업, 신흥무관학교 교관 역임

● 종군장교      김훈, 이민화, 백종열, 한권원 / 신흥무관학교 졸업

● 제1중대장     강화린 / 신흥무관학교 졸업

● 제4중대장     오상세 / 신흥무관학교 졸업, 교관 역임


■ 이름 없는 독립투쟁 영웅들

1. 강화린

제작진은 부산의 한 병원에서 청산리 전투의 제1중대장으로 참전했던 강화린의 부인 이정희 여사를 만날 수 있었다. 평생을 조국을 위해 살았던 강화린은 1960년 어린 남매를 남겨 놓고 눈을 감았다. 독립운동을 하다 이름 없이 떠난 동료들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던 강화린. 이정희 여사는 먼저 떠난 남편의 뜻을 받드는 데 평생을 바쳤다. 청산리 전투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해 작은 돌비석이라도 세워주기를 바란다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조촐한 추모비를 세웠고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던 이름 없는 참전자를 찾기 위한 운동을 펼쳐왔다. 


2.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최후의 순간

“나라 잃은 몸이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나 죽거든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백서농장을 건립한 만주독립군의 거장이었던 김동삼은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 이감돼 복역하던 중 그 곳에서 순국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해 줄 가족조차 국내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만해 한용운이 직접 나섰다. 죽음을 무릅쓴 용기였다. 그는 자신의 거처였던 심우장으로 김동삼의 시신을 옮겨 장사를 치렀다. 


■ 독립군의 역사!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개설 이후 3,500여 명의 인재를 키워냈다. 이들은 청산리 전투 참전은 물론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의열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등에 참여하며 무장독립운동의 주축으로 활동했다. 암울했던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이름 석 자 남기지 못하고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눈감은 이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 묻혔지만‘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는 우리 독립군의 역사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신역사스페셜 78회 -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특별기획 2부작 

제2부 만주벌 이름 없는 독립전사들  (2011.8.18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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