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저널 그날 | KBS 실험실

[역사스페셜] 금동관, 백제통치의 비밀을 풀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962회 작성일 23-05-23 22:27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JFrWEpSEMVs

본문


[KBS 역사스페셜] 금동관, 백제통치의 비밀을 풀다.


- 고흥 길두리 금동관, 1,600년 만에 원형을 찾다.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에서 가장 먼 전라남도 고흥 길두리. 2006년 이곳에서는 세간의 이목을 끈 발굴이 있었다.  직경 34미터, 높이 5미터의 무덤에서 피장자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는 환두대도,금동신발,금동관이 줄줄이 발굴됐다. 특히 환두대도, 금동신발, 금동관이 세트로 다 갖춰져서 나오는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최고의 정치적 상징물이자 위세품의 꽃이었던 금동관은 그렇게 극적으로 세상 밖으로 나왔고 5년의 복원작업을 마치고 2011년 2월에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600년이 지난 지금 금동관이 우리에게 전하는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


- 백제정치사를 규명할 블랙박스! 금동관

고흥 길두리를 비롯하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공주 수촌리(2점), 서산 부장리, 천안 용원리에서 발견된 7종의 백제 금동관. 넓은 지역에 걸쳐서 발견됐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7점 모두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고깔모자 형태의 관에 양쪽 측면에 세워진 장식판, 정수리엔 꽃봉오리 모양의 수발 등 백제 특유의 독특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역사의 기록에 많이 남지 않은 백제사, 더군다나 남은 유물이 거의 없는 현실에 금동관은 백제 정치사를 규명할 블랙박스로 주목되고 있다.


- 시대의 명품, 백제금동관

한강 유역에서 시작한 작은 나라 백제가 어떻게 중국과 한반도 남단 일본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해상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금동관은 동판에 금을 입힌 것으로써 동판에 문양을 새겨 넣고 그것을 오려내어 섬세한 문양을 넣은 당시 최고의 예술품이다. 첨단 장비들이 없던 그 시대 정성과 함께 당시 최고의 기술을 필요로 했던 백제금동관. 

고도의 제작기술 뿐 아니라 제작에 필요한 금이나 수은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 수종인 백화수피까지 쓰인 것으로 보아 희귀재료 통제권을 가지고 선진문물을 흡수했던 왕실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백제 왕실에서는 금동관을 지방 최고의 수장에게 보내 지방지배 체제를 바로 잡고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백제는 어느 사서에도 통치의 기록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백제금동관은 백제 통치 시스템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열쇠다.


- 고대시대 ‘새’, 하늘과 지상의 메신저

7점의 금동관 중 무려 4점이 새 모양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대사회에서 새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수도 한성을 시작으로 문화를 꽃피운 백제는 한반도 남단의 끝 고흥까지 세력을 넓혔다. 백제가 정복한 마한 지역의 오랜 전통이었던 ‘새 숭배 사상’은 자연스럽게 북방의 문화와 융합되었고 백제 통치의 중심이던 금동관에 새를 화려하게 형상화시켰다.


- 백제, 해상교역을 통해 위기 극복을 꿈꾸다.

삼국 중 해상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백제. 금동관이 발견된 지역은 주변에 모두 하천이 발달되어 있다는 지리적 공통점이 있다. 백제는 해로(또는 수로)를 이용해 지방을 지배했고 바닷길을 통해 해외교역망도 확보했다. 일본 규수지역의 ‘에다후나야마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특유의 조금, 투조기술을 사용한 금동관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동안 신라금관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백제금동관 안에는 백제인들의 혼과 지혜 그리고 백제를 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꿈이 담겨있었다.


신역사스페셜 68회 – 금동관, 백제통치의 비밀을 풀다 (2011.5.19.방송)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153
천년의 역사 탐라국
작성일 2024-04-03

공지글


최근글


새댓글


  • 댓글이 없습니다.


참한역사칼럼 바로가기
참한역사신문 바로가기
참한역사 동영상 바로가기
新바람 한민족역사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