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는 누구의 땅인가? - 정계비(상) | 청나라가 숨긴 목적과 배경 및 국제 질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777회 작성일 23-06-01 00:28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RCLgWYgXyeU

본문

[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간도는 누구의 땅인가? - 정계비(상) | 청나라가 숨긴 목적과 배경 및 국제 질서 


백두산 정계비는 무엇을 알려줄까?

국경문제는 영토의 넓이, 자원의 소유권, 지정학적인 가치를 넘어 존재의 명분과 자의식 등과 직결된다. 그러므로 망각하거나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문제이다.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육지와 해양의 12개 이상 장소에서 국경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한국은 독도, 이어도,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와 함께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간도 문제가 있다. 간도영유권 문제의 단초가 되는 사건이 백두산의 정계비이다. 이 비안에 새겨진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란 글자로 인하여 19세기 후반부터 토문의 위치 문제, 즉 두만과 토문의 동일성 여부를 놓고 한국·중국·일본, 심지어는 한국 내부에서도 쟁점이 됐다.

정계비의 내용과 복잡성, 다양한 견해들을 이해하려면 우선 국경문제의 본질과 남만주 일대의 역사적인 상황, 그리고 이 사건이 발생한 과정과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들을 파악해야 한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는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는 대부분이 여진족들의 ‘생활권’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초에 정묘호란이 발생하고 조선과 ‘강도(江華)화맹’을 맺으면서 후금은 강역 문제를 거론했다. 이어 병자호란 이후에는 산삼·녹용 등을 구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 두 강을 몰래 건넌 조선인들로 문제가 복잡해졌고, 강희제 때에 들어오면 상황이 급변하고 더욱 복잡해졌다. 

청나라가 정계비를 세운 목적과 배경, 경위 등을 이를 주도한 강희제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청국과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작업이었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삼번의 난’마저 진압한 강희제는 시조 발상지로 알려진 장백산(백두산)의 성지화 사업이 필요했다. 그는 1676년에 관리를 파견해 장백산을 답사하게 한 후에 산신께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1683년에 또 관리를 파견했으나 압록강 상류에서 조선 민간인들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 사건은 조선에 엄청난 파장과 다수의 희생을 일으켰다.   


둘째, 만주 지역의 장악과 개척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남쪽에서는 포르투갈 등 서양세력과 무역하고, 17세기 중반에는 명나라 복국군이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였고, 1683년에는 청나라가 대만을 점령했다.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1666년에 흑룡강 상류 유역에 알바진 기지를 건설한 후에 송화강 유역까지 남진하자 전투를 벌였고, 1689년에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선을 정했다. 서쪽으로는 강력하게 성장하는 중가르 한국과 충돌하고, 1687년에 신장성 지역을 원정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강희제는 전통적인 명분과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국제관계로 인식하는 중이었했고, 영토 또한 서양의 국경개념을 수용하여 조약을 맺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강희제는 만주의 안정과 개척, 백두산의 성지화를 위해서는 조선과 국경선을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미 남만주와 국경 지역에 한족들을 대거 이주시켜 개척하는 이민정책을 추진 중이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청나라의 움직임에 놀라 ‘영고탑 회귀설’ 등이 유포되는 등 불안한 상황이었다. 


셋째, 지리개념의 변화와 서양문물의 수용이었다. 천문학과 지도 제작술이 도입되면서 정확한 지도의 작성이 가능해졌다. 강희제는 1708년에 프랑스 선교사인 레지 신부에게 전국의 영토와 국경을 조사하고, 지도를 제작할 것을 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레지 일행은 1709년부터 최신의 삼각측량법을 이용해 만주 일대를 측량했고, 12월에는 드디어 만주지역의 지도가 완성됐다. 강희제는 1710년에 조선에 파견된 사신단에 측지학자를 보내 조선지도를 구해왔고, 레지는 이 지도를 참고하고 보완해서 1718년에 최종지도를 완성했다(김득황, 『백두산과 북방경계』).  이 무렵 조선은 이 지역을 그린 지도를 가졌고, 급변하는 상황의 중요성도 인식했다. 다만 패전국이었고, 환국 등과 을병 대기근을 겪고 난 후유증으로 청나라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서 정계비를 자국 중심으로 해석하고, 심지어는 비의 위치가 4번이나 이동됐다는 주장까지 한다. 러시아의 영토 전문학자인 갈레노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마오쩌둥과 그의 추종자들은 ‘지도를 통한 공격’을 했다.” 중국인들은 지도를 왜곡하거나 유리하게 만들고,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 지도를 제시하면서 자기주장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을 쓴다는 것이다.


윤명철, " 동아시아의 해양영토분쟁과 역사갈등의 연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공지글


최근글


새댓글


  • 댓글이 없습니다.


참한역사칼럼 바로가기
참한역사신문 바로가기
참한역사 동영상 바로가기
新바람 한민족역사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