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무오)독립선언서'는 만주에서 독립군들이 주축되어 선언한 최초이며, 자주적인 선언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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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447회 작성일 23-06-01 00:23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K0pZjbj1-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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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대한(무오)독립선언서'는 만주에서 독립군들이 주축되어 선언한 최초이며, 자주적인 선언서였다.


대한(무오) 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서울 한복판에서 33인이 서명한 선언서(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기기 전부터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곳곳에 세운 크고 작은 학교에서 역사와 전투 방식을 가르치고, 군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데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질서에는 변화가 생기고, 약소민족들의 처지가 개선될 듯 보였다. 그러자 몇 몇 지사들은 독립투쟁의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여 무오년, 즉 1919년 2월 1일 만주에서 39인의 이름으로‘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최초의 독립선언서는 몇 가지 다른 점들이 있다. 우선 ‘대한’이라는 정식 국호와 ‘독립’이라는 목표를  구체적으로 적시하였다. ‘대한 제국’은 자주성을 지키고,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채택된 역사적인 용어이므로 일본은 법령을 제정하여 ‘한국’이라는 용어를 못 쓰게 하는 대신 ‘조선’이라는 용어를 강요했다. 때문에 임시정부는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을 국호로 삼았고, 청산리 전투처럼‘대한독립군’이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민중적인 언어를 사용하였고, 평화와 대화가 아닌 ‘육탄혈전’같은 전투성을 강조하였다. 서명한 39인은 대부분이 만주와 미국 등에서 독립운동을 펼쳐온 독립투사와 독립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제가 철저하게 부정했던 단군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독립전쟁의 명분으로서 내세웠다. 작성한 주체를 비롯하여 서명인들은 민족종교이면서 독립군의 주역이었던 대종교와 직접,간접으로 연관이 있었다.


  이 선언서의 발표를 시발로 2월 8일에는 일본의 동경에서 ‘전조선 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유학생들이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다시 3월 1일 서울에서 33인이 모여 조선독립의 의지를 표명하는 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의 조계지에서 수립되었고, 청산리 전투 등에서 보이듯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독립군의 활동들이 있었다.  


 이 일련의 흐름을 ‘3.1 운동’이라고 부르는데, 세계사적으로도 의미가 크지만, 민족사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질적으로 변화시킨 최초의 계기였다. 국민들은 무력한 나라와 지배세력에 본격적으로 분노하였고, 식민지 국민이 돼버린 자신들의 무기력하고 방관적인 행위를 반성하면서 ‘역사의 주체’가 되어갔다. 이러한 의식은 훗날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거름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들을 촉발시킨 ‘대한독립선언서’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고, 앞으로 우에게 민족 발전의 전략과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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