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들과 임시정부는 왜 단군을 내세우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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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94회 작성일 23-05-31 23:58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GMTXACjpr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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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독립군들과 임시정부는 왜 단군을 내세우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했을까? 


개천절(開天節).

4353주년. 하늘이 열린 날이다. 하늘의 아들인 환웅이 내려와(下降) 땅의 어머니인 웅녀(곰)와 만나 ‘단군왕검’을 낳고, 그 후손들이 신시(神市)에서 ‘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이라는 사상을 펼치면서 뜻 깊은 역사의 대장정을 시작한 날이다. 개천절은 원조선·부여·고구려· 백제·신라·가야 등 모든 나라들이 다른 이름과 형식으로 기념하고, 전승시킨 날이었다. 근대에 들어와 민족종교이며, 독립전쟁의 산실인 대종교에서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했고, 대종교인이 대부분인 임시정부의 의정원에서 건국 기념일로 제정한 후에 해마다 행사를 벌였다. 이후 대한민국이 1949년에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제정했다.

 이 시대의 독립운동은 주체의 대부분이 대종교인들이었고, 대종교의 조직을 최대한 활용했다. 서간도에는 1911년에 고구려의 첫수도로 알려진 환인에 대종교의 윤세복 형제가 동창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 학교에서 윤세복과 김교헌의 영향을 받아가며 역사를 연구하고 조선사(훗날 "????조선상고사")를 비롯한 명저들을 낸 박은식과 신채호, 그리고 잠시 동안 국어를 가르쳤던 이극로도 대종교인이었다. 

역시 1911년에 통화 지역에 이회영 등 6형제와 이상룡 등이 도착하여 경학사를 세웠고, 신흥강습소를 거쳐 신흥무관학교로 변신해가면서 무려 3500명 이상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들은 고구려의 수도권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훗날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의용군은 대다수가 대종교인이었다(박영석, "만주 노령지역의 독립운동"). 

동간도에는 발해의 한 때 수도였던 화룡현을 중심으로 독립군들이 활동했는데, 청파호 옆에는 나철이 대종교 본사를 세운 후에 독립전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이후에 발해농장을 운영하면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활동자금을 공급하다가 고문으로 순국한 안희제도 대종교인이었다. 한편 19세기말부터 두만강 너머의 연해주인 핫산·불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 등에서 국내진공 작전 등을 지휘했고,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지원했던 이상설 등도 대종교인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가 귀국해 60대 노구를 이끌고 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또에게 폭탄을 투척했다가 사형당한 강우규 열사, 천연두 예방법을 소개하고 한글학자였던 지석영 선생, 신간회 운동을 주도했던 임꺽정의 작가인 홍명희(북한의 부수상), ‘한글’이란 말을 만든 주시경 선생과 제자인 김두봉(북한에서 숙청)·최현배 등도 대종교인이었다. 실제로 1942년에 발생한 ‘조선어학회 사건’은 대종교 교주인 윤세복이 이극로에게 ‘단군성가’를 자곡해줄 것을 부탁한 내용이 발각되면서 빚어진 사건이다. 

또 식민사학자들과 맞서서 우리 역사를 연구한 장도빈·안재홍·정인보 등의 역사학자들과 언론인들, 아리랑 작곡가인 나운규, 조소앙·이시영·신규식·김규식·이동녕 등의 정치인들도 대종교인이었다. 심지어는 기독교인인 이승만과 안창호 등도 단군의 중요성을 실천했었다. 때문에 일본은 대종교가 창시될 때부터 위험세력으로 판단해서, 1915년에 일본이 총독부령으로 ‘종교 통제안’을 공표할 때 대종교를 ‘종교를 빙자한 ‘독립운동 단체’라고 허가를 취소하고 탄압했다. 나철은 1916년 음력 8월 한가위 구월산 삼성사에서 한민족 선도의 호흡법으로 자진 순국했다. 


계속되는 내우외환으로 국난에 처했다.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추세이다. 역사에서 한 집단의 흥망성쇠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따라서 질적으로 쇄신할 필요가 있을 때는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와 붕괴 직전의 위기를 체험하는 기회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책없이 시대의 희생자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가능한 한 우리 힘으로 극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해결의 방략과 모델, 강한 의지와 자신감을 독립군들처럼 우리 역사와 단군에서 찾는 것은 어떨지.

    

참고문헌 : 윤명철, "단군신화, 또 다른 해석"  " 우리 민족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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