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전쟁 2- 백제 왜연합군의 백강구 해전서 대패. 왜군 27,000명 전사, 왜선 400척 불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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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423회 작성일 23-05-31 23:58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kqtRH31Rd6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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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삼국통일전쟁 2 | 백제 왜연합군의 백강구 해전서 대패 | 왜군 27,000명 전사, 왜선 400척 불탐. 


백제는 육전이 아니라 기동성과 잠행성, 급습성을 특성으로 한 해군의 원거리 상륙작전에 일거의 타격을 받고 몇일 만에 무너졌다. 이 같은 원거리 해상이동과 대규모의 상륙작전은 새로운 양상으로 기존의 전쟁방식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해양전은 전쟁의 승패뿐 만 아니라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렇게 해서 동아지중해 국제대전의 완결편인 소위 삼국통일전쟁은 처음부터 격렬하게, 그리고 빠른 결과를 내었다.

그런데 백제가 항복한 직후까지도 이 전쟁이 국제대전이며, 고수 전쟁·고당전쟁의 연결선상에 있다는 것을 주변국들이 눈치채지 못하였다. 물론 신라만은 당나라와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외였다. 사료를 통해서 나타난 당시의 정황은 백제의 멸망을 바라보는 고구려와 왜국의 대응이 너무나 조용했고, 신중해 보이기까지 했다. 


먼저 왜의 움직임을 살펴보자.

백제의 복국군은 신속하게 왜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야마도 정권에는 백제의 영향력이 강했고, 왕자인 풍(풍장)도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국은 개전 초기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더구나 해전 능력이 부족하여 군대의 파견이 더뎠다.  마침내 사이메이(齊明)천황은 661년 정월 越(현재 쓰루가 지방, 고구려 사신들이 도착하던 장소)지방을 거쳐 2월에는 큐슈의 북부에 임시관청을 설치하고, 전쟁을 지휘하려는 순간에 급사해버렸다. 아들인 텐치(天智)는 같은 해 8월 군사와 무기, 식량 등을 백제군에 보냈다. 9월에는 왕자인 풍장(豊璋)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귀국하여 왕이 된다. 이렇게 해서 본격적인 국제전이 벌어진 것이다. 남쪽에서는 신라와 당을 한편으로 하고,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전투를 벌이고, 북부와 만주에서는 당군이 거느린 다국적군과 말갈을 동원한 고구려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왜국은 662년(天智 원년) 춘정월과 3월에도 화살 등 무기와 식량 등 군수물자를 보냈다. 다시 5월에는 군선 170 여 척과 많은 병사들을 파견하였다.  663년에는 2만 7천명의 군사를 파견한다. 대규모의 해상수송선단이 참여하였고, 다국적 수군끼리 격돌하는 본격적인 해양전의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개전 초기에는 해양세력이 서에서 동으로 일방적으로 이동하였지만, 이제는 남에서 북으로 해양이동과 상륙작전이 벌어지는 양상이 되었다. 나당연합군 또한 해양전을 활발하게 이용하였다. 백제 부흥군이 40여성을 수복하는 등 공세를 취하자 孫仁師는 지원군 40만의 병력을 거느린 채 바다를 건너 덕물도에 도착하였다.


663년에 이르러 백제의 부흥군은 고구려와 공조체제를 모색하였으나 나당군은 포위망을 좁히면서 본거지인 주류성(周留城, 州柔城)을 공격하였다. 수륙양면작전을 시도하여 성을 점령한 다음에 백제와 왜의 연합수군을 격멸하려는 전략이었다. 당나라에 항복한 부여융(扶餘隆)은 수군 및 군량보급선을 거느리고 웅진강(熊津江)으로부터 백강(白江,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금강설,홍성설,동진강설,부안설 등을 주장한다.)으로 가서 육군과 합류하여 주류성으로 향하였다. 백·왜 연합군은 웅진강 입구에 방어책을 세웠다. 드디어 8월, 대해전인 백강(白江, 白村江)전투가 벌어졌다. 당나라의 수군은 전선 170척을 거느리고 진을 쳤다. 왜군은 1000척의 배를 거느리고 백사(白沙)에 머물렀고, 백제의 정병들은 언덕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다. 이 때 백제의 속국이었던 탐라의 수군도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양군은 백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백강구)에서 전투를 시작하였다. 백왜 연합군은 대패해 400여 척의 전선이 불탔고, 27,000여명이 전사하였다. 결국 이 서남해 대해전에서 패배한 백제의 유민들과 왜군은 일본열도로 패주하였고, 일본 내 중요한 전략적 거점에 해양방어체제를 급속히 구축한다. 


해군력이 훨씬 강한 나당연합군은 바다를 건너 올 가능성이 많았다. 실제로 당나라는 664년 5월에 곽무종(郭務倧)과 병사들을 보내 대마도에 상륙시켰고, 다음 해에는 수도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심지어 669년에는 전후보상과 내정간섭을 요구하였다. 백제인들과 왜국인들은 적선의 본토 상륙작전을 분쇄하기 위하여 전방부터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664년에는 최전선인 대마도, 이끼섬(壹岐嶋), 쯔쿠시(筑紫國)에 수비병(防人)을 두고, 봉화대(烽燧臺)를 구축하였다. 또한 큐슈의 해안에 있던 정청을 20여 km 더 내륙으로 들어간 다자이후(太宰府)로 옮겼다.


참고도서

윤명철 지음 : 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한민족 해양활동이야기 1, 한민족 바다를 지배하다. 한국해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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