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태왕의 평양 천도 1 | 황해 진출로 외교 군사 강국을 추구한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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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512회 작성일 23-06-09 00:53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tN2xWjJZZ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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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장수태왕의 평양 천도 1

황해 진출로 외교 군사 강국을 추구한 정책이었다. 


장수왕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휘는 거연(巨連)이다. 개토왕의 원자이니 모습이 괴걸(魁傑, 걸출)하고 지기(志氣)가 호매(豪邁)하였다. 개토왕 18년에 태자로 책립 되었다가 22년 왕이 돌아가자 즉위하였다. …… 98세에 붕어하시니 시호를 장수왕이라고 하였다.” 

그가 즉위했던 당시 동아시아 세계는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이 전개되는 중이었다. 중국은 오호 16국에서 위·진·남북조 시대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화북에서는 북위가 통일을 추진하면서 북연을 치고 있었고, 강남에서는 동진이 멸망하면서 송이 건국되었다. 북방 초원은 유목민족인 유연이 통일했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에 위축되었던 백제가 일본의 세력과 동맹을 도모하는 한편 신라와도 우호관계를 수립하면서 재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해륙국가인 고구려의 장수왕이 세운 국가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이상과 목표는 고구려를 동아시아 세계의 제국으로 만들고, 물자가 풍부하여 백성의 삶이 편안하며,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이상사회였다. 장수왕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지만, 결국 고구려 역사에서, 또는 한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를 이룩했다.

장수왕은 무려 78년 동안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장수왕은 정복 활동을 벌이면서 영토를 더욱 확장했지만, 외교와 무역에도 중을 두었고, 이는  해양활동과 관련이 깊었다. 그가 추진한 최대 정책인 평양 천도 사업은 다분히 해양력을 의식한 행위였다. 

『삼국사기』 동천왕 21년조(247년)에 보면 “평양은 본래 仙人 王儉의 터이다. 혹은 말하기를 왕이 도읍한 王險이다”라고 하였다. 그만큼 평양은 고조선 계승을 표방한 고구려에게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장소였으므로 건국 초기부터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명분 외에도 평양은 그 무렵의 국제질서를 고려하면 실질적인 이익 창출에 적합한 전략적인 도시였다. 국제외교 구도상으로도 유리했다. 중국이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었으므로 등거리외교의 필요성이 증대되었고,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 맺는 관계도 다중방사상(多重放射狀)의 형태로 변모되었다. 

따라서 장수왕은 능동적으로 국제질서를 재편하기위해 외교전을 신속하게 펼치고 중국과의 외교를 독점하고 통제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성은 압록강의 중류에 위치한 소규모의 내륙하항도시였으므로 대외교섭에 한계가 있었다. 또한 고구려는 중국지역과 생기는 긴장관계 때문에 육상전 뿐만 아니라 해상전의 가능성을 고려해야하는데, 국내성은 불안했다. 그리고 숙원사업인 남진정책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더욱 남쪽에다 교두보이자 전진거점을 확보할 필요성이 컸다.


윤명철 : 고구려 해양사 연구 / 한국해양사 / 장수대왕, 그에게 길을 묻다. / 광개토태왕와 한고려의 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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