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국내성 시리즈 1 | 유리왕이 첫수도 '홀본'을 버리고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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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671회 작성일 23-06-09 00:10본문
[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고구려 국내성 시리즈 1
유리왕이 첫수도 '홀본'을 버리고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유?
유리왕 21년, 서기로는 3년이다. 나라의 중요한 제사에 제물로 쓰일 돼지가 난데없이 탈출하여 어디론가 달아났다. 임금은 신하인 설지에게 명령하여 신속하게 뒤쫓게 하였다. 어느 날 ‘국내 위나암’에서 돼지를 붙잡은 후에 궁으로 돌아와 임금에게 아뢰었다. “국내(國內)는 산수가 험하고 땅이 5곡에 알맞으며 산짐승(순록과 사슴)과 물고기가 풍부합니다. 만일 왕이 그곳으로 國都를 옮기면 民利가 무궁할 것이며, 또한 병난(兵革之禍)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삼국사기???? 권 18, 유리왕 21년조.)
유리왕은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아버지 없이 부여 궁전에서 천덕꾸러기도 자랐다. 아버지가 7모가 난 돌 위의 나무 위에 숨겨놓은 신표인 부러진 단검을 찾아냈다. 3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고구려로 달려와 태자가 되었고, 제 2대 임금자리에 올랐다. 유리명왕이며, 이름은 유리 혹은 유류라고도 하였다. 해유리 또는 고유리인 셈이다.
그는 기록을 다 믿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게 정복전쟁을 펼쳤다. 서북으로는 선비족을 치고 요동진출을 감행하여 매우 정력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부여 등으로 부터 공격을 받기도 한다. 성장한 고구려에게 수도는 전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보통 수도는 통치의 중심지이며 모든 정치권력들이 집중된 곳이다. 수도의 선택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을 수도 있다. 군사도시의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한다. 또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온갖 물자들도 모여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수도인 홀본은 전선에 가까워 위태롭고, 팽창하기에 비좁다.
유리왕은 신수도 부지를 물색하였고, 국내지역을 점찍었다. 만반의 준비를 끝나고 즉위 22년, 즉 기원 3년에 백성을 편안케 하여 나라(邦業)의 토대를 굳건히 한다는 목적을 내걸고 천도를 강행했다. 그런데 강건한 성품을 가진 21살의 젊은 해명은 홀본을 사수하겠다며 반대했다. 5년이 지날때까지도 옛 수도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유리왕은 “내(유리왕)가 천도한 것은 백성을 편안케 하여 나라(邦業)의 기초를 굳게 하려 함인데, 너(해명)는 나를 따라오지 않고 힘센 것을 믿고 이웃나라와 결탁하여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 된 도리가 이럴 수가 있겠는가”(삼국사기)라고 탓하였다. 그리고 칼을 보냈다.
그러자 해명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첫수도의 동쪽 뜰에다 창을 꽂아놓고 말을 타고 달려가 찔려 죽었다. 고구려인다운 자결로 끝을 맺은 것이다. 이렇게 임금의 강렬한 포부와 야망, 정권의 명운을 건 저항운동, 아들을 잃는 슬프고 처절한 아픔을 겪으면서 국내성은 고구려의 두 번 째 수도로서 태어났다. 그리고 427년에 평양지역으로 다시 천도할 때까지 무려 400 여 년 동안이나 고구려 역사의 산실이며 재생하는 穴이면서 힘을 주는 빛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이 국내라 불리우는 수도가 현재 중국 길림성의 집안(集安)시이다.
윤명철 지음 : 고구려 해양사연구 /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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