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지중해 국제대전 2 | 고구려와 당나라(고당)의 해양전에 동원된 전선들은 사천성 등 양자강 상류에서 건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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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307회 작성일 23-06-09 00:10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awv5UcttZj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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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동아지중해 국제대전 2

고구려와 당나라(고당)의 해양전에 동원된 전선들은 사천성 등 양자강 상류에서 건조됐다. 


당태종은 해양능력을 바탕으로 대규모의 병사와 군수물자를 요동반도의 남부해안과 한반도의 서해안 지역에 상륙시키는 작전을 추진했다. 644년 7월에 강주와 홍주(강서성 일대) 등에서 전선 사 백 척을 만들어 군량을 운반했다. 큰 전선들은 800명의 병사를 수용했고, 일반 루선도 200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었다. 1차 전투에 패배한 후인 648년 7월에도 장강 상류(사천)에서 전선들을 건조하고, 8월에는 홍주 등에서 해선(海船) 등 1천 1백 척을 건조하게 했다. 

 645년 수군장군인 장량은 평양성 직공을 계획하고, 4만의 병력(당회요에는 7만 명)과 500여척의 선박으로 산동반도의 동래항(현재 봉래시)을 발진했다. 묘도군도를 따라 요동반도 남단이고, 발해와 서해를 연결하는 해상관문이며, 내륙진출의 거점인 비사성(지금 대련시 금주) 앞에 상륙했다. 해군사령부였던 비사성은 음력 5월, 서문으로 야간급습을 받고, 8000명이 전사하면서 함락당했다. 승리한 장량은 일부 함대를 압록강 하구로 파견했으나, 자신은 안시성으로 갈 수 없었다. 고구려가 요동반도 남쪽 해안과 섬들에 구축한 성들과 수군의 저항 때문이다.     

당나라는 60일 동안 무려 50만 명을 동원하여 성의 동남쪽에 토산을 쌓아 공격하려 했다. 그런데 토산은 완성 직전에 무너졌고, 고구려군은 재빨리 점령해버렸다. 장기전이 되면서 음력 9월이 됐고, 추위와 군수품의 보급 문제로 당군은 황급하게 철수했다. 이때 태종은 성주가 쏜 화살에 눈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이색의 '정관음'). 당군은 한 겨울의 요택(뻘)지역에 빠져 처절한 상황에 처했고, 말은 10의 8,9가 얼어 죽었다('자치통감'). 태자가 보낸 결사대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당태종은 고구려 공격을 만류했던 ‘위징’을 부르면서 통곡했다. 하지만 초원의 투르크계인 설연타를 세력권으로 편입시키고, 다시 647년과 648년에는 대규모 수군으로 요동반도 해안과 압록강 하구를 공격했다. 그리고 649년에 정체불명의 병으로 죽었다.


(윤명철, '고구려 해양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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