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비 3부 | 고구려사상과 미학의 결정체(거대함, 생명, 소박함, 조화, 소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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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264회 작성일 23-06-09 00:10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UAlCrw_f3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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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광개토태왕비 3부

고구려사상과 미학의 결정체(거대함, 생명, 소박함, 조화, 소박) 


광개토태왕비는 414년 즉 태왕이 돌아간지 2년째 되던 해에 젊은 임금인 장수왕이 위대한 임금이면서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는 크기로도 뭔가를 말하고 있다. 몸체가 높이 6,39m이고, 한 면이 1,35m에서 2m인 사면의 각력응회암이고, 비를 받친 대석은 직경 20cm의 네모꼴의 화강암이다. 무려 3층 높이의 두툼하고 넉넉한 품을 지닌 돌덩어리인데, 지금과 달리 그 무렵에는 보는 이에게 중압감을 줄 정도의 크기이다.  치솟구치는 열정을 주체치 못해서 터져나온 힘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까? 하늘로, 높은 곳으로, 신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디딤돌로 세워놓은 것일까? 사실 크다는 것은 때로는 무의미할 수 있다. 모든 가치있고 위대한 존재물들이 꼭 늘 클 이유는 없다. 하지만 작아야만 할 이유도 없다. 더구나 커야할 것이 적다면, 그건 오히려 우스운 일이다. 릉비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큰 비이다. 릉비가 크다는 것은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라 고구려가 큰 나라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다가서면 기가 가득 차 있음이 느껴진다. 생기의 결정체이다. 기계적 존재가 아닌 자연인, 유기체로서의 인간은 기가 꽉 차고, 순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는 맑은 진실 속에서 샘물처럼 퐁퐁 솟아올라 채워져야 하고, 어느 곳 하나 막히고 굴곡지면 안된다. 두루 두루 통해야 자유로워지고, 그래야 인간은 우주와 역사와 하나가 된다. 


그 외에 비석은 어떤 의미와 내용들을 담아내고 전달하는 것일까? 


 비는 통념을 깨는 모양을 갖고 있다. 글로 표현하기가 매우 힘들 정도로 복합적인 형태이다.  전체적으로는 직육면체의 꼴을 갖추고 있지만 사실은 네면과 위 아래 등 육면이 반듯반듯하지 않다. 

특별한 점은 또 있다. 비석의 아래 변이 대체로 1, 3m 정도 인데,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두터워지고, 오히려 폭이 더 넓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하늘을 지향하는 고구려인들은 마음을 量으로가 아니라, 質로서 표현하였다. 형식과 정제미를 소중하게 여기는 고전주의와 형식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폭발할 듯한 내면의 열정으로  자유로움과 감동을 표현하는 낭만주의가 절묘하게 혼합한 것 같다.   야성과 지성과 감성이 조화된 듯한 분위기이다. 

우리겨레가 타고난, 하늘로부터 받은 기인지, 아니면 고구려의 그 자랑스러운 역사가 부지런히 채워놓은 기인지, 온 몸뚱이에 가득 차있다. 기는 혼이고 얼이다. 기가 차야 인간은 역사와 하나가 된다. 일제시대에 단재 신채호가 본 비, 독립군들이 본 비, 위당 정인보가 본 비. 그 광개토태왕릉비를 우리가 이제 보면서 그들이 찾아서 전하고자 했던 고구려의 얼을 느껴가고 있다. 

묘한 점은 또 있다. 표면은 울룩불룩한데다가 어떤 부분은 파여진 그대로 두었다.  그 자체로서 온전한 한 덩어리의 돌이다. 부분이 아니라 부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체인 돌이다. 그 온전한 결정체를 약간 다듬어 자연스러움을 더욱 예술적으로 살리면서 글씨를 새겨놓았다. 인간의 손길, 신의 손길이 반반씩 간 듯한 느낌이다. 


왜 고구려인들은, 장수대왕은 그 부왕인 동아시아의 영웅을 기리는 비석을 이런 불완전한 모습으로 놓아두었을까? 이 어수룩함과 무정제성 속에서 무위자연, 형식보다는 본질을 더 좋아하고, 덜 정제된 사회, 덜 형식화된 세상을 원한 고구려인들의 사유를 느낀다. 그들의 미의식과 시대정신을 느낀다.

 이 무렵의 고구려는 열정적으로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터를 넓히고, 다른 자연환경 속에서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문화를 가꾸며 살아온 여러종족들을 국민으로 삼았다. 그런데 정복전쟁의 주역인 광개토태왕을 기리는 비가 위압적이고, 거대하고, 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신국민, 피정복민들은  굴욕감을 느끼고, 두려움에 고구려에 저항할 것이다. 고구려인도 자만심에 빠져 우쭐될 수도 있다. 하지만 넓어지고 다양해진 신고구려는 내부가 하나로 통일돼야만 강력한 힘을 발휘해서 북방종족들이나 한족들과 경쟁을 벌일 수 있다. 그렇다면 모두를 끌어안고, 이질적인 문화들을 고구려라는 큰 용광로에 넣고 녹여내야만 했다. 그러한  논리를 만들고, 시스템을 그러한 필요성에 맞춰 구축하며, 이를 전파하기 위해  때로는 예술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현명한 고구려인들은 상생과 조화의 정신을 알리고자, 이러한 자연스럽고 검박하고 의미를 가득 담은 비를 세운 것이다. 장수대왕이 모양도 독특하고, 담긴 뜻도 깊고 숭고한 이 비를 세운 것은 고구려가 대국이 되었다는 기념도 아니고, 영웅의 묘비명도 아니었고,  고구려백성들, 초원의 백성들, 삼림 속을 헤매이는 복속된 백성들 모두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래서 이 비를 통해서 ‘鄒牟天帝之子 母河伯女郞’ 또 ‘我是 皇天之子 母河伯女郞’라고 하여 고구려인들이 하늘의 자손이며 명분없이 살아가는 무리가 아님을 밝혔다. 

또 고구려는 옛 조선의 터를 회복하고, 그 시대에 살았던 조상들의 신원을 복원해야 한다는 일종의 국시를 선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비가 수 천 년의 세월 속에 서 있고, 이 모습과 글을 수 천 수 백 만의 사람들이 보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태어날, 먼 훗날 후손들에게도 전할 역사의 씨줄, 날줄을 꼼꼼히 새겨놓았다.


 윤명철 지음,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말타고 고구려 가다" " 고구려는 우리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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