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제나라는 산동반도를 거점으로, 장안을 공격했고, 55년간 번영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309회 작성일 23-06-08 23:05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D5hnkOmM0IQ

본문


[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제나라는 산동반도를 거점으로, 장안을 공격했고, 55년간 번영했다.


*이정기의 탄생과 국제질서의 변화

고구려는 70년 동안의 긴 전쟁에서 패배했고, 유민들은 산동성, 강소성, 심지어는 감숙성, 청해성, 사천성까지 끌려갔고, 남은 일부는 요하를 사이에 둔 벌판에서 고달픈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당나라는 안정되고, 통일된 나라가 아니었다. 특히 8세기 중반에 이르면  돌궐의 부흥, 토번의 공격, 파미르 지역의 산악 소국가들과 중앙아시아의 도시국가들은 당 체제에서 이탈했다. 아랍인들은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당나라의 무역망을 빼앗으며, 영토까지 잠식하려 했다. 그런데 당나라의 반격은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 패배로 실패했다.  

한편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사를 게을리 했고, 정치는 혼란해지면서 ‘안록산의 난’이 발생했다. 이 때 요서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정기는 761년에 사촌인 후희일과 함께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발해를 건너 산동의 등주로 이주했다. 

산동 지역은 고구려 유민들에게 의미가 크고, 세력을 확장시키기에 유리했다. 신석기 시대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곡창지대였고, 어업이 발달했다. 수로가 발달해서 내륙 물류망이 발달했고, 해양교통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7000년 전부터 요동지역과 교류했으며, 원조선이 모피를 수출한 지역이다. 또한 동이인들의 핵심 터전이므로 우리와 교류가 빈번했다. 이 시대에는 고구려 유민, 백제 유민, 그리고 신라인들이 거주하였다. 따라서 독립하는데 필요한 우호집단들이 있었고, ’고구려의 부활‘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에 적합했다. 발해와 신라가 파견한 사신단들과 상인들이 상륙하던 무역의 거점으로서 경제적인 전략지역이었다. (윤명철, "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 유라시아 정치 질서의 변화와 이정기의 등장 

7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일본은 새나라 건국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신라를 공격한다는 선언을 한 상태였다. 발해는 당나라 공격에 성공한 후에 우호관계를 추진 중이었고, 신라는 분열과 갈등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운남성 일대에서는 737년에 남조국이 통일을 이룩하였고, 토번과 동맹을 맺으면서 당나라와 대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나라 조정은 765년 그에게 평로치청절도사라는 이정기라는 이름, ‘육운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陸運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라는 관직을 내렸다. 발해 및 신라와 맺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모든 관계를 관장하는 당나라로서는 동방정책을 추진하는 가장 중요한 거점의 직책이었다. 


* 이정기의 공격과 제나라 건국 

 그는 소요와 반란을 진압한다는 핑계를 대고 영토를 넓혀 갔고, 마침내 산둥(山東)반도의 전 지역은 물론이고, 장쑤성(江蘇省)의 일부 지역까지 차지했다. 운하경제에도 손을 뻗쳐 경제력이 막강해졌다. 775년에 이르면 15개주의 84만호(약 400여만 명)를 다스리는 번진으로서 사실상 국가의 위상을 갖추었다.

 그런데 이정기는 779년에 거점을 운주(鄆州)로 옮겼다. 대운하의 물류망을 장악하기에 유리한 곳이면서, 수도인 장안과 매우 가까웠다. 위협을 실감한 조정은 대병력을 집결시켰고, 이정기 또한 공격을 했다. 강회지역에서 승리한 이정기는 10만의 병력으로 장안공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여름 종양으로 서거하였다(지배선, "중국속 고구려왕국, 제"). 이어 아들인 이납(李納)이 절도사의 직위를 계승한 후에 다시 ‘제(齊)’나라를 건설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어 아들들인 이사고(李師古)와 이사도(李師道)를 거치면서 819년까지 55년 동안 산둥반도 일대를 지배하고 통치했다. 당나라는 제나라를 공격했으나 번번히 실패했고, 신라에 3만 병력을 파병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결국 제나라는 멸망했는데, 당나라의 주력부대인 무녕군(武寧軍)에 참여해 군중소장으로 출세한 인물이 백제계 후예인 장보고(張保皐)였다. 이후 제나라 지역에 거주했던 고구려·백제계의 유민들은 새로 건너온 신라인들과 섞여 당나라의 해안과 대운하 주변에서 소위 ‘재당신라인’이라는 역사적인 존재로 탈바꿈했다.


한 개인의 삶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고, 그 판단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역사에는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라는 도식적인 평가가 가능하지 않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공지글


최근글


새댓글




참한역사칼럼 바로가기
참한역사신문 바로가기
참한역사 동영상 바로가기
新바람 한민족역사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