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유민 디아스포라' 시리즈 2 | 몽골초원, 실크로드 사막, 토번의 청해성, 사천성, 운남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요서지방 등으로 끌려간 20여만명의 고구려 포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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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720회 작성일 23-06-08 23:05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eTx8F3mo4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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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교수의 역사대학] '고구려유민 디아스포라' 시리즈 2

몽골초원, 실크로드 사막, 토번의 청해성, 사천성, 운남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요서지방 등으로 끌려간 20여만명의 고구려 포로들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에서도 많은 포로들이 잡혀갔다. 반면에 구나라 병사들도 고구려에 포로로 잡혔다.  영양왕은 당시 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최초의 사찰인 아스까사가 창건되고, 불상이 완공될때 황금 300냥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고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포로 2명과 낙타 등을 왜국에 보낸 적이 있었다.   그 후 당나라의 태종이 파견한 직방낭중인 진대덕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을때 수나라의 포로들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렸다. 후에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수나라의 포로들과 그들의 시신을 묻고 세운 기념물인 경관을 철거해줄 것을 요구했었다.    

645년, 고당(高唐)전쟁에서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요동성(遼東城) 전투에서 패배해 군인과 백성 등 7만여 명이 요주(요서·요동) 등으로 끌려갔고, 다시 1만4000명이 유주(幽州·베이징 일대)로 끌려가 정착했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함께 고사계 같은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669년 5월엔 20만 명(“자치통감”에는 3만8200호, “구당서”엔 2만8200호)이 끌려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또 679년에는 요동지역의 유민들을 하남(내몽골 오르도스)과 농우(간쑤성과 칭하이성 일대)로 이주시켰다. 이후에도 여러 번 끌려가서 나중에는 요동지역에 남은 사람이 2만 명이 못 될 정도로 줄었다(지배선, “고구려 백제 유민이야기”, 2006).

(윤명철, "고구려 해양사 연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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