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하가점하층문화의 고조선 정전제(井田制)를 밝히다. | 고문자연구소 창립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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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74회 작성일 24-07-18 09:27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JArYzZ4zj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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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와 역사TV] 처음으로 하가점하층문화의 고조선 정전제(井田制)를 밝히다. | 고문자연구소 창립기념

맹자가 말한 하은주 정전제의 시원은 어디인가? 

정전제의 시원은 고조선이다.

고문자연구소는 고조선의 시각에서 갑골문을 해석할 것입니다. 

고문자연구소는 갑골문과 古한글을 연구합니다.


이찬구 박사 논문 결론 소개 


 본 글은 2300여 년 전 맹자가 말한 정전제의 시원을 여러 문헌과 유물과의 교차검증을 통해 하은주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고조선 또는 부루단군으로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夏의 정전제는 우가 고조선의 부루를 통해 전수받은 것으로 볼 수 있고, 周의 정전제는 공류(公劉)가 시행한 철법(徹法)의 정전제로 고조선군 주둔지인 빈(豳,邠)땅에서 융적(戎狄)에 의해 전수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 殷의 정전제에 관해 이미 주자가 ‘은에서 정전제가 시작되었다’고 언급한 만큼 은의 정전제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같은 동이족인 고조선에서 직접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하가점하층문화의 요서지역에서 발굴된 기원전 2000년경 전후 시기의 ‘정전벽돌’이 고조선(숙신)의 정전제인 구정도(邱井圖)의 모형일 가능성이 높아 동북아의 정전제가 고조선에서 시원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관련 문헌과 고고학적 교차검증을 통해 하가점하층문화에서는 정전제가 이른 시기부터 실시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고, 요서의 하가점하층문화가 중국에서 숙신(肅愼)의 문화유적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곳의 해당 정치체는 옛 동북이(東北夷)인 고조선이라고 본다. 『단군세기』의 문헌과 출토된 ‘정전벽돌’을 비교하면 고조선 부루단군의 정전제(구정제) 시행 시기와 장소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정전제가 기자(箕子)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과거의 주장은 사실의 왜곡이며 이보다 앞선 고조선의 초기로 바로잡혀야 할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정전제가 기원전 2000년경 전후기에 이미 시행되었으며, 하은주의 정전제도 고조선의 정전제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은주 3代의 정전제는 그 시원이 중원의 황제(黃帝), 공류(公劉), 기자(箕子)가 아니라 고조선의 부루(夫婁)라고 본다. 당시 도산(塗山)회합에 부루가 태자 자격으로 참석해 오행치수법을 전수한 점, 공류가 융적(고조선)의 성에서 거주한 점 등을 고려하면 중국의 하은주를 둘러싼 국제관계가 고조선과 긴밀하게 연결되었고, 고조선이 정전제를 중심으로 동북아에서 주도적으로 문화 경제적 교류를 활발하게 이끌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문화구성 요소들의 상호 교류에 의해 문명의 성격과 범위가 결정된다면 동북아에서 최초로 시행된 고조선의 정전제는 요하문명에서 황화문명까지 영향을 미친 중요한 문명요소라 할 수 있다. 

  끝으로 동학혁명 당시에 제시된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케 할 사’의 개혁안과 정약용의 정전제와의 연관성이나,「전제망언」을 어윤중에 건의한 이기(李沂)가 직전에 전봉준을 만났다는 사실로 볼 때 정전제의 정신은 근대까지도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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