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탑골공원 옆 공터에서 발견된 의문의 금속, 현대과학으로도 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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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참한역사미디어 댓글 0건 조회 524회 작성일 23-05-28 20:32
유튜브출처 : https://youtu.be/TznxI9hHB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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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씨멘터리] 서울 탑골공원 옆 공터에서 발견된 의문의 금속, 현대과학으로도 풀지 못했다.


5천년 전부터 극소수 한국인에게만 전수된 비밀, 반도체보다 더 신기한 1급 기밀 


인류는 예로부터 흙, 나무, 돌 등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그릇을 만들어왔으나 놋그릇, 즉 구리를 이용해 그릇을 만든 나라는 전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합니다. 유기(鍮器)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놋그릇’의 한자식 표현인데 유기에는 구리와 주석을 섞어 만든 ‘청동(bronze)’과 구리와 아연을 합금한 ‘황동(brass)’으로 구분됩니다. 신라가 가장 번성했던 경덕왕 11년(752년) 3월, 신라의 왕자 김태렴은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해 ‘비즈니스’ 외교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 귀족들의 관심은 김태렴 왕자가 아니라 사절단에 포함된 상인들이 가져온 신라의 물건에 있었죠. 왕자 등 일부 사절단이 간사이 지방의 일왕을 만나러 간 동안 신라상인들은 공예품, 향료, 비단 등을 펼쳐놓고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때 일본 귀족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았던 품목은 단연 놋그릇이었습니다. ‘속일본기’ 등 당시를 기록한 일본의 역사서들은 이들이 판매했던 물품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일본 왕실의 옛 보물창고인 ‘쇼소인’에는 당시 귀족들이 사고 싶어했던 신라산 무역품의 목록을 적어둔 ‘매신라물해’라는 문서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 중 놋그릇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만큼 높았던 것은 아무래도 나무 그릇을 사용하던 일본인들에게 신문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기는 재료의 성분과 비율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넓은 의미로 보자면 ‘구리’를 베이스로 하는 비철금속계의 합금으로 그 기원은 청동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런데 전세계에서 이 ‘유기’를 가장 잘 사용한 것은 우리 한민족입니다. 이미 신라시대에 유기 제작을 담당하는 ‘철유전’이라는 담당기관을 별도로 두면서 합금기술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는데 그래서 중국에서는 신라가 만든 유기를 두고 ‘신라동’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문헌에도 나타나있는데 명나라 이시진은 “페르시아 동(銅)은 거울을 만드는 데 좋고, 신라동은 종을 만드는 데 좋다”고 쓰고 있고, 1490년 동월은 “고려동(高麗銅)은 질이 우수하여 당(唐)과 송(宋)에서 수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그 합금기술은 더욱 발전했고 화폐, 금속활자, 악기, 생활용기 등에 유기가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놋그릇을 그렇게나 사랑했던 일본인들이 일제시대 전쟁물자로 사용한다면 각 가정마다 남아있던 놋그릇을 전부 수탈해가는 바람에 한동안 그 맥이 끊기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놋기술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방짜’입니다. 유기는 제작 기법에 따라 ‘방짜’와 ‘주물’로 나뉘는데 주물은 구리에 아연, 주석 합금의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촛대, 향로, 화로 등을 만드는 기법이고, 방짜는 구리와 주석 합금을 녹여 쇳물을 만든 후 이를 바둑알 모양의 둥근 놋쇠덩어리로 만들어 망치로 쳐서 모양을 잡아가는 기법을 말합니다. 


방짜로 만든 것은 인체에 무해했던 덕분에 식기류로 애용됐고 소리가 청명해 꽹가리를 만들기도 했는데요.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유기 제작방법은 경기도 안성에서 만들었던 주물제작법, 평안북도 정주에서 만들었던 방짜제작법, 전남 순천에서 만드는 반방짜제작법이 있습니다. 그 중 안성의 주물제작법은 가장 쉽게 놋그릇을 만드는 방식이면서 그 조형미가 아름다워 ‘안성맞춤’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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